책 읽는 엄마, 책 읽는 아이들
책 읽는 엄마, 책 읽는 아이들
  • 공금란
  • 승인 2004.04.23 00:00
  • 호수 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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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에 앉아
책 읽는 촌부의 모습
어찌보면 낯선 풍경이지만
아름답고 자랑스런 우리 어머니
4월 23일은 1995년에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날’이다. 책의 날을 맞아 전국 유명서점에서는 책과 장미꽃을 나눠주는 행사를 가졌다. 또 한 TV 프로도 책을 읽자며 책 읽는 국민 만들기 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머잖아 OECD국가 중에서 책을 제일 안 읽는 나라의 불명예를 씻을 날이 올 것 같아 흐뭇해진다.
이번 주 기자가 만난 사람은 화양면 추동리 이정희 씨(45), 그저 그런 평범한 촌부(村婦)이다. 서천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대출해 가는 몇 가정을 소개받고 평소 안면이 있는 터라 무턱대고 정희 씨 집을 찾았다.
추동마을 앞에서 모판을 가득 실은 화물차와 마주쳤다. 운전석에 낯익은 얼굴의 아줌마가 앉아있다. 그녀가 바로 이정희 씨이다.
더불캡인 그 화물차 안엔 품앗이하는 마을 아낙 대여섯 명이 자리가 비좁은 듯 옹색하게 앉아있다. 일년 농사의 시작인 모내기철, 부지깽이도 써 먹어야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라 정희 씨를 비롯한 마을 아낙들이 모조리 나선 것일 게다.
정희 씨가 몰고 가는 화물차의 꽁무니를 따라 금강변을 돌아 다다른 곳엔 못자리를 정갈히 만들어 놓고 그녀의 남편(박기배)과 마을 아저씨들이 기다리고 있다.
잠시 짬이 난 시간, 그녀는 논두렁에서 책을 펼친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이라 더니…. 장화를 신은 체 책을 편 그녀의 모습은 어찌 보면 낯선 풍경이지만 아름답고 자랑스런 우리 어머니들의 당당한 모습이고 용감한 아줌마의 표상이다.
큰딸 지혜, 아들 우성이, 막내딸 지원이, 이렇게 세 자녀를 둔 정희 씨는 평소 자녀들에게도 책 읽는 모습을 모여주는 엄마다. 덩달아 자녀들도 책을 가까이 함은 물론 큰딸 지혜는 글 솜씨까지 좋아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곧잘 타온다.
어느 해인가는 온가족이 삼국지를 함께 읽느라 독서삼매경에 빠져 여름방학을 보낸 적도 있단다.
이정희 씨에겐 별 특징이 없다. 그저 오다가다 시장에서 만나는 아줌마고 논두렁에서 만나는 시골 아낙이고 학교 자모회에서 만나는 엄마다. 집에 가봐도 그녀의 남편이 취미 삼아 하는 분재 온실 외엔 일반 농가와 별 다를 게 없다.
봄이면 씨뿌리고 모내기하고, 여름이면 밭에 나가 김매기하고 가을에 두렁 콩을 거둬들이는 평범한 농촌 아낙이고 아내이자 엄마이다.
단지 그녀가 사람들의 눈에 평범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틈틈이 책을 든다는 것과 서천군의 환경 지킴이로 각종 환경단체 활동과 행사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문에서 유흥준 교수는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그녀는 책을 통해 아는 만큼 실천하려 한다. 아이들에게는 다정하고 온화하며 때론 혹독히 질책도 하는 우리네 어머니, 남편에게 순종하면서도 자기의 권리를 적절히 누릴 줄 아는 아내, 주어진 땅에 빈틈 없이 콩알 하나라도 심으려는 억척스런 농부 정희 씨. 그러면서도 사회적으로도 적극적으로 자기 몫을 하는 당당한 시민이다. 그녀는 책을 통해 아는 만큼 관심을 갖고 그 대상들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원초적 본능 이외에 아는 것 없는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어떻게 알아 가느냐 하는 것, 무엇을 알 것인가, 드디어 무엇인가 알았다 등의 앎의 과정들 속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 책 읽기, 독서인 것이다.
정희 씨, 그녀는 평범하지만 흙투성이 농투성이로 살면서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녀가 책을 들고 논두렁에 앉아 있거나 식탁에 앉아 있거나 혹은 볕 좋은 마루 끝에 앉아 있어도 잘 어울린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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