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0, 15, 20, 25, 30, 다시 5일…
5, 10, 15, 20, 25, 30, 다시 5일…
  • 공금란 기자
  • 승인 2004.07.16 00:00
  • 호수 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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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슬고 무너진 판교5일장을 지키는 사람들

 7월10일, 장마전선 틈틈이 드러나는 햇살이 오랜만에 눅눅한 판교장터에 퍼진다.
예전에는 전국 굴지의 우(牛)시장이 서, 시끌벅적했을 터이지만, 정오가 되기도 전에 판을 접는 상인들이 눈에 띈다.

파란만장했던 옛 명성은 찾아볼 수 없는 빈 장터다. 이런 풍경들은 정치권이 약속한 재래시장활성화정책의 혜택 또한 도회지, 최소한 시·군소재지 내의 재래시장에 국한될 것이 뻔해 또 다른 서글픔이다.

그래도 아직 서천지역에는 1·6일 한산장, 2·7일 서천장, 3·8 장항장, 4·9 비인장, 5·8 판교장이 5일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밖에도 길산장, 마산의 안장, 문산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사람이 살기 시작한 옛날부터 서로 필요한 물건들을 통용하던 것이 시골 읍· 면의 5일장으로 자연스럽게 발달 된 것이다. 5일장에서는 물건만 통용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까지 주고받으며 작은 지역 단위 문화가 특색 있게 꽃피게 되었고 그 고장의 특산물에 따라 특별한 재래시장으로 발달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생성된 곳이 판교장, 판교의 우시장이 전국적인 규모로 발달했던 것이리라. 천방산자락마다 상수리나무가 많아 도토리묵이 풍성했을 터이다. 하여 판교장을 찾은 사람들은 소를 팔고 사고 나면 이 도토리묵에 판교주조장에서 나온 탁배기로 속을 쓰려 내렸을 법하다.

판교주조장은 이미 60~70년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판교장에는 과거로 사라질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미사진관’ 깨어진 쇼윈도에 지금은 늙어진 배우가 아직도 20대 풋풋한 얼굴로 웃고 있다. 초라한 출입문에 붙여놓은 퇴색해 가는 메모지엔 “영업합니다, 연락처 011-XXX-XXXX”라고 적혀있어 전화를 해봤다. 올해로 67세 된 노(老)사진사는 몸이 아파 장날에만 잠시 문을 연다고 한다. 그 옛날에는 제법 근사한 2층 신식건물이었을 ‘장미사진관’을 돌아 본격적인 장터로 들어섰다.

오전 열한시 반, 벌써 판을 접는 상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 벌어진 생선전은 이래저래 파리만 날리고 있다. 생선전이래야 함지박 한두 개에 상자하나를 엎어놓고 좌전을 벌이고 있는 아낙네 세 명뿐이다. “애기엄마~, 떨이라 싸게 주께” 호객을 하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들려오는 굵은 남정네들의 얘기소리를 따라갔다. 농자재를 고루 갖춰 판교장 좌판에선 가장 큰 듯하다. 주인과 오랜 단골의 두 남정네가 묵은 얘기며 앞날의 걱정을 늘어놓고 있다. 모내기도 끝나고 새끼거름도 줬겠다, 장마비가 오락가락 집에 있어봤다 딱히 할 일도 없어 귀동냥이나 하자고 나와 앉았단다. 잡초가 숭덩거리는 시장골목을 돌아서면 키, 소쿠리, 용수, 나무주걱 잡다한 아낙네들의 살림살이를 파는 최 영감님의 좌판이 있다.

“한개도 못 파는 날도 있유, 그래도 놀아서 뭐혀 평생 이걸로 잔뼈가 굵었는디” 4남매에게서 여러 손주를 봤지만, 당신의 슬하에서 키운 아들네의 두 손자가 “질루 이쁘다”고. 그래서 “그 녀석들한테 용돈 주는 게 질루 좋지”라며 옛날엔 먹고살라고 했는데 지금은 손주들 용돈 주는 재미로 좌판을 벌인다는 77세의 최 영감님이다.

상인들이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양철로 지어놓은 한두 평되는 녹슨 창고를 돌아서는 데 제법 그럴싸하게 장터분위기가 나는 곳이 있다.

옹기전, 칠순 훌쩍 넘은 옹기전 할머니와 보령에서 옛날 옹기 사려고 일부러 왔다는 중년의 살림꾼부부들이 한참 흥정을 벌이고 있다.

   

“할머니 말이 돼요? 항아리에 뚜껑까지 만오천 원이라며 뚜껑만은 만삼천 원이라니” 답답하다며 하소연하면서도 얼굴엔 흥이 흥건하다. 할머니야말로 옹기장사로 잔뼈가 굵었으니 손님들의 그런 반응을 모를 리 없을 터다. 인심 쓰듯 깎아 주며 흥정을 마친다.

그네들은 간장, 된장 대신 매실주며 과일주를 담글 고만고만한 항아리 몇 개를 샀다. 옹기장수할머니는 포장은커녕 그냥 가져가도 안 깨진다며 주저앉고, 먼길에 행여 깨질세라 손님들이 알아서 포장한다.

손바닥만한 장터,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것은 없다. 시들해져가는 판교장을 지키는 상인들은 5일장 떠돌이를 수십 년씩 한 사람들이고 또 이들을 찾아 나선 손님들 또한 시골5일장의 마지막 세대일 성싶다.

썰렁한 장터지만 판교장을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시장기가 돈다. 판교장에 가면 먹을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함지박만한 그릇에 한가득 담긴 냉면, 아니면 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는 보신탕.
둘 중 하나를 먹고 손등으로 입을 쓰윽 닦아야 비로소 판교장 구경을 마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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