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통지 받으면 어쩔 수 없었지”
“징용통지 받으면 어쩔 수 없었지”
  • 이후근 기자
  • 승인 2005.03.04 00:00
  • 호수 2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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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료 한 푼 없는 강제 노역 동원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이승용 노인
   
▲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이승용 할아버지<사진/이후근 기자>
“하도 배가 고파서 콩 삶은 것을 동료들과 함께 훔쳐 먹다 들켜서는 한 밤중에 기합 받던 일이 생각나네, 그 땐 얼마나 배가고프던지”

일제 강점기 징용노무자로 일본 북해도에 강제 동원됐던 이승용 씨(84·마산면 이사리)는 반평생 가슴속에 쌓아뒀던 강제징용의 사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승용 씨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반세기나 지났지만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기산사람 여섯하고 서천군 사람들은 모두 합해 한 40여명 됐지, 근데 모두들 다 죽고 이제 나만 남았어” 당시 이 씨와 함께 기산면 지역에서 북해도로 강제동원 된 청년은 모두 6명. 이씨는 그 이름들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씨의 기억에 의하면 조인행, 윤천석, 김만겸, 임종규, 김하진 씨 등이었다. 이 가운데 6명 모두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지만 모두 사망, 현재는 이 씨가 유일한 생존자이다.

“분명 강제였지, 면에서 징용대상자라는 통지를 받으면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지,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도대체 피할 방법이라고는 없었지” 이 씨의 증언은 일제의 징용이 강제였음을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 민중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징병, 징용 등의 방법을 동원 강제연행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제연행된 조선민중들은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로 이용됐다. 1943년 이 씨와 함께 서천을 출발했던 이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고향 서천을 떠난 이들은 부산, 시모노세끼, 아오모리, 하고다데를 경유하는 오랜 여정을 거쳐 북해도의 무로란(室蘭)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 씨와 동료들은 그곳에서 거적을 깔아놓은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북해도의 석탄, 목재 등 일제 전쟁 물자를 기차에 하역하는 역무노동에 동원됐다.

이씨는 “배고픈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고 게다가 다이죠라 불렸던 일본인 감독들은 조선출신 노무자들을 군대식으로 관리 감독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2년 동안 끌려가 일하면서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고 가정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거꾸로 집에서 돈을 부쳐와 그것으로 생활했지만 나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정말 죽을 고생을 해야만 했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강제동원 되기 전 이들은 대부분 한 가족의 가장들이었다는 것이다. 변변한 농토 하나 없던 이 씨와 같은 소작인의 처지에서 보면 어쩌면 형벌보다 더 무거운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씨도 부인과 자녀 둘을 둔 상태에서 소작으로 어려운 살림을 연명하던 처지여서 가장이 강제동원 후 남은 가족들의 생활상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이 씨가 떠난 후 가족들은 그나마 부처 먹던 소작마저 떼이는 등 형용할 수 없는 생활상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급기야 이 씨는 어린 딸의 사망소식이 들어 있는 소식까지 들어야 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친동생을 전쟁터에서 잃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강제징병당해 군인으로 끌려간 동생 이승운 씨는 남양군도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이 씨의 중언들은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이 불러온 한 가족의 비극사를 증언하는 너무도 명확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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