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의 지혜로
수구초심의 지혜로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7.01.26 00:00
  • 호수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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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기 복
칼럼위원

“얘야! 너도 그 집 사람들을 보면 인사하지 말거라. 인사해야 받지도 않고, 그 집 애들은 하나같이 인사할 줄 모르는데, 바보같이 너만 인사하고 다니느냐.”

어머니는 등굣길에 나선 나에게 위협적인 자세로 명령을 하였다. 나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만나면 여지없이 머리가 숙여졌다. 묵묵부답으로 스쳐지나 가시는 어르신의 모습은 10여 년째 똑 같았다.

종중재산 문제로 집안간이면서도 10여 년이 넘도록 불화가 지속되었다. 한 마을 안에서 서로 간에 증오와 불신의 벽을 쌓아올리는 것은 모두에게 고역이었다. 더구나, 우리 집만 인척 관계가 먼 탓으로 어린 내가 당하는 고통은 더욱 심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언제까지 불화만 계속될 것 같던 집안 간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 새에 나는 청년이 되었다. 화해가 이루어진 이후로 집안 어른들의 나에 대한 태도가 황송할 정도로 돌변하였다. 그동안 응어리진 가슴도 봄눈처럼 녹았다. 정말 몸이 날개를 단 것처럼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인간으로서 인간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하던가!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실현’이야 말로 최고의 가치이자 이념이다. 이를 위해 민주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실태를 보면, 상대방 헐뜯기와 불신하기, 내 주장은 끝까지 고집하기 등이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다. 그처럼 행동하는 것이 마치 민주주의 시민의 특권처럼 여기고 있다.

한국의 정치적 권위 의식은 대단하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조선왕조의 정통을 이은 것처럼 자타가 의식하였고, 박정희는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같이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분들도 출신 섬에서는 ‘우리 섬에서 왕이 나오셨다.’며 풍장치고 좋아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대통령이 마치 ‘왕’인 것처럼 섬김을 받던 시절이 엊그제에 불과하였다.

오늘날에는 시골길에서 만난 초등학생도, ‘노무현이’, ‘노통이’ 라고 하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참, 격세지간이다. 필자가 중학교 때에, 언제 어디서나 “박정희 대통령 각하” 라고 해야 한다던 생각이 난다. 이제 더 이상 대통령이 왕이 아니라는 점을 깨우친 국민들께 박수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초등학생조차 ‘노무현이’, ‘노통이’ 라고 하는 말에 동감이 가지 않는다. 이제 타에 의해 억눌리던 권위주의는 무너졌다. 그러나 타를 억누르려는 ‘신권위주의’가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싶다.

이쯤에서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의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제의 원조국인 미국에서 포드 전대통령 영결식에 보내는 미국 국민의 성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타를 나와 동일하게 보고, 나를 내가 존중하듯이 타를 존중하는 자세가 가장 절실하다. 이웃을 존중하고, 대통령부터 군수, 군의원까지 우리 손으로 선출한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가장 절실하다.

정해년을 맞이하여 관용과 화해의 정신으로 부활하는 시민이 되기를 기대하여 본다. 증오와 불신의 벽을 떨고, 신뢰와 화합의 정신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여 볼 일이다. 왕권신수설로 완전무장한 절대군주를 무너뜨린 것은 천부인권론(=인간의 존엄성)을 신뢰하고, 화합의 정신으로 일으킨 시민혁명의 결과였던 세계사를 음미해 볼 일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고자 출발하였다는 점을 되새겨보자. 근대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시민혁명은 차치하고, 1960년의 4·19혁명에서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수많은 피를 흘리며 얻고자 한 참 의미를 헤아려볼 일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고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며, 민주주의는 신뢰와 화합의 기반 위에 성립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 수구초심의 지혜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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