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한 장
추억 한 장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7.02.16 00:00
  • 호수 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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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웅순/중부대 교수>

전과와 수련장을 샀다. 그 날도 오늘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내가 비를 맞는 것은 괜찮으나 내가 산 책은 비를 맞아서는 안 된다. 나보다도 책이 먼저였다. 옷 속에 넣고 꼭 껴안고 걸었다.

철길 건너 그 먼 신작로 길. 지금은 차로 2,3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아이 걸음으로는 40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 왜 그리도 그 신작로 길이 멀고도 멀었던지. 전신주를 세면서 걸었다. 신작로를 벗어나면 이젠 들녘을 가로질러 가야한다. 그 들녘은 얼마나 멀고 또 얼마나 멀리 있었던가. 너무 멀어 이제는 전신주를 세며 갈 수가 없다.

내 눈을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젖지나 않았는지 몇 발자국 가고 살펴보고 또 몇 발자국 가고 떠들어 보고 했던 그 전과와 수련장. 그 때마다 빗물과 함께 코를 스치던 향긋한 인쇄 향기. 가슴은 또 얼마나 벅차고 뛰었는지 모른다. 

얼마 만에 불러본 이름이냐. 이름만 들어도 아늑하고 정겨운 눈물 날 것 같은 전과와 수련장. 벌써 40년도 훌쩍 넘었다. 그 때는 선생님 말고는 물어볼 사람이 없다. 감히 선생님께 질문도 하지 못했다.

나 같은 둔재에겐 전과는 큰 스승이었고 수련장은 나를 단련시키는 조련사였다. 독서는 선생님의 말씀과 그것이 전부였다. 만화는 선생님이 보지 못하게 했고 동화책은 학교에도 없어 읽을 수가 없고……, 돈이 없어 사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인데 전과나 수련장을 그나마 난 가질 수 있었으니…….

교과서와 전과 그리고 수련장이 내 독서의 전부였던 초등학교 시절. 봄비와 전과, 수련장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마는 나에게는 참으로 눈물겹도록 정겨운 이름들이다. 비에 젖을까 봐 옷 속에 꼭 껴안고 20리 길을 걸어 왔으니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아팠을 것인가. 아픈 것은 괜찮다. 책만 젖지 않으면 된다.

지금 이런 얘기를 아이들한테 하면 본전도 못 찾는다. 미련하다 할 것이다. ‘책 사러 이십리 길을 왜 가나, 비도 오는데 차라리 안 사고 말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월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 세상에 세월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 세상에 문명이란 또 무엇인가. 세월과 문명은 인간의 마음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나에겐 참으로 소중하고 애틋했던 그 전과와 수련장. 그것은 돈도 보석도 아닌 나보다도 더 아끼고 사랑했던 무량의 그리움이요 애절함이기도 했던, 차라리 아픔이기도 했던 아련한  추억 한 장을 아이들한테 나눠 줄 수는 없을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오늘 같은 날 그 책은 누구한테서도 보여줄 수 없는 나의 보이지 않는 뜨거운 눈물이리. 그래서 나는 지금 책 속에 묻혀 책과 함께 시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빗줄기 속에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전과와 수련장을 사주고 싶어 아버지는 논둑에서 어머니는 부엌에서 얼마나 애를 태웠을 것인가. 당시 책 한 권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 어머니의 찌든 땀방울과 맞바꾸는 일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나보다도 더 소중한 책에 차마 비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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