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 뉴스서천
  • 승인 2001.02.21 00:00
  • 호수 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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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흘러 온 곳은
되찾지 않는 강물
항상 낮은 곳만을
향하는 강물은
탐욕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를
냉엄하게 꾸짖는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은 항상 살아있다. 시작으로부터 싱싱하게 살아있으면서 폭포에서 더욱 크게 살아있음으로, 그리고 나루에서 삶의 터울을 이어준다. 여울에서 잠시 스스로의 살아있음에 박차를 가하다가, 바다에 이르러 유유한 터전을 건사한다. 산에서나 들에서나, 살아있음으로 해서 더욱 값있는 빛을 모으고, 움직임으로써 삶에 윤택함을 더하는 것이 흐름이 있는 강물이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살아있음에 강물은 항상 현재만을 가지며, 과거라는 그림자에 슬퍼할 것도, 미워할 것도, 즐거워할 것도, 혹은 좋아할 것도 가지지 않는다. 오직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현재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하며 살아 움직일 뿐이다. 그래서 강물은 한 번 흘러온 곳은 되찾지 아니한다. 되돌아보지도 아니한다.
더더욱 강물은 미래를 꿈꾸지 아니한다. 당연히 주어진 길을 숙명처럼 다스리며 묵묵히 밑으로만 흘러내린다. 주어진 길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오직 한 길로만 삶의 길을 엮어 나가는 모습은 강물만이 가지는 강생관(江生觀 : 인간에게 인생관이란 것이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강에는 강생관이 있을 것이 아닌가?)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러한 강물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져 나타나는 것은 역시 주어진 길에의 순종(順從)이다. 강물에게 주어진 길의 순종이란 무엇보다도 뒤돌아보지 아니하고 밑으로만 간다는 것이다. 이런 강물에 비하여 사람들은 어떠한가? 뒤돌아보아 탐욕(貪慾)을 만들고, 미래를 바라보아 치욕(恥辱)을 낳는다.
아래보다는 위를 바라보아 스스로의 길을 비굴(卑屈)로 만들고, 빈자리를 건너 뛰어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이루면서 마침내 파멸(破滅)의 길에 이른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라. 처음의 흐름에서부터 오직 밑으로만 흐르면서, 빈자리를 하나하나 골라, 건성으로 보아 넘기는 일도 없이 채우면서 만족을 얻어 가는 모습을! 그리하여 마침내 너르고 깊고 푸른 바다를 이루어 놓고는, 그 깊고 그윽하고 순수함을 빚어 진주를 공글리고, 조용한 마음을 넉넉하게 손질하여 물낯 위로 햇살을 노닐리며, 푸르름을 한데 모아 하늘까지 함께 하여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이 강물이다. 깊고 푸른 마음으로, 혹은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그리고 거센 심장의 고동(鼓動)으로 살아 있음을 넉넉하게 펼친다.
바야흐로 이제는 봄이다. 입춘이 지나고 우수도 지난다. 머지않아 경칩도 온다. 대동강물도 풀릴 것이다. 그렇다면 강물의 흐름은 더욱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봄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항상 강물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낮고 가난한 것이 풀린다. 아니 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순수하고 맑고 밝은 곳부터 찾아간다. 그래서 봄이 오면 가난하고 욕심이 없는 낮은 사람들이 먼저 반긴다. 그런 의미에서 강물과 봄은 항상 한가지의 모습으로 살아 오른다.
올해는 봄과 강물과 같은 삶을 요구한다. 국가적으로 지도자를 뽑고, 국제적으로 월드컵이라는 제전을 펼칠 것이요, 도내적(道內的)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안면도 국제꽃박람회가 향기를 뿜어 올릴 것이다. 가슴 설레도록 주어진 길을 풍요롭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봄을 맞아 강물처럼 흘러가야 할 것이다.

<구재기 에세이/시인·충남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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