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은 선악을 조절하는 일종의 출입구인 셈이다. 잠재 의식 속의 악이 선을 짓밟고 고개를 내밀 때 양심이라는 마개가 이를 나오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오히려 선을 바깥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양심이 빠지게 되면 ‘마개 빠진 인간’ ‘양심 없는 인간’ ‘양심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1910년 전후의 한말 ‘마개 빠진 인간’들이 들끓던 시대이래 오늘날처럼 ‘양심 없는 인간’이 들끓는 예도 드물 것이다.
몇몇 ‘양심 없는 여성’들 사이에 회자되던 옷로비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황태자들을 둘러싼 게이트는 상상을 초월, 국민들을 억, 억 거리게 만들고 있다.
정치인들 또한 서로 격려·견제하며 바른 정치를 펴나가 달라는 뜻에서 국민들이 3년 전 ‘금배지 완장’을 달아주었건만 저수지 감시를 맡은 한량 임종술이 완장(윤흥길의 대표작)을 두르고 안하무인, 마을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발버둥치듯 국민생활을 외면하고만 있다.
외환위기 이후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살얼음판을 거니는 것 마냥 제대로 오금을 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과 국익은 안중에도 없이 터뜨리고 보자는 식의 망발을 일삼는 것이 믿었던 정치인의 행태요, 편가르기·세 불리기·눈치보기 등 막무가내식 편법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정치인이다. 무슨 ‘후보 완장’을 두른 분들도 전방으로, 사고현장으로, 건설현장으로, 시장통으로 서민들은 아랑곳없이 헤집고 다니는 모습이 ‘양심 없는 사회’의 일면목을 보는 듯 하여 식상이 된지 오래이다.
지난 6.13 선거때 지방에선 지역연고·씨족관계·학교문제 등이 뒤엉켜 민망한 처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차라리 지방선거가 없었으면 이웃간 얼굴 붉힐 일이 없을 텐데”하고 탄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홍역 속에서 탄생된 지역의원·단체장은 중앙정치의 복사판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사명감을 갖고 주민들의 심정을 십분 헤아려, 응어리진 마음들을 말끔히 풀어주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만약 “면장이 바뀌면 면사무소 주사까지 바뀐다”는 말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며 지금 왼팔에 두른 완장은 최부자가 임종술에게 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주민이 달아준 표상이니 만큼 주민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라는 민의의 완장이라는 사실을 직시, 올바르고 깨끗하고 도약하는 군정이 되도록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양심 없는 사회’는 사라지고 양심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로 변해 나갈 것이다.
<김지용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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