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동포들의 삶’ 기록으로 남기겠다
‘러시아 동포들의 삶’ 기록으로 남기겠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0.04.05 18:14
  • 호수 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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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에 정착한 '고려일보' 전 부국장 정장길씨

현재 옛 소련에는 55만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다. 구한말 조선 정부의 혹독한 가렴주구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족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있는 5개 섬과 사할린 섬은 북위 50도를 경계로 일본의 영토가 되었는데 이곳에 조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또는 징용으로 끌려왔으나 일본의 패망 이후 다시 러시아 영토로 환원되면서 귀국하지 못한 채 무국적자로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1945년 이전에 출생한 동포 일부가 일본정부와 대한적십자사의 주선으로 다시 모국 땅을 밟아 인천, 경기도 안산, 김포, 화성, 충남 천안, 충북 제천 등지에 수천 명이 정착하였다. 지난 달 11~13일에는 49세대 94명이 서천에 와서 서천 군민으로 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정장길(67)씨를 만나 그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파미르 고원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아랄해로 흐르는 시라드리야 강물을 이용해 관개를 하고 비행기로 법씨를 뿌렸습니다"

사할린에서 태어나 까자흐스탄으로

 

그는 1943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에 경남 거창이 고향인 그의 조부가 사할린 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정씨 일가는 무국적자로 남게 되었다.

“1945년 전쟁에 패하자 일본이 조선 사람들을 버리고 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때부터 조선 사람들은 무국적자로 남게 되었는데 무국적자란 것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경찰 허가 없이는 4km 밖을 나갈 수 없습니다. 경찰 허가를 얻으려면 25일 이상 걸립니다. 버스를 타고 친지를 찾아가다가도 검은머리를 한 조선족들은 검문에 걸려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9년도에 블라지보스토크 아래 나호뜨카에 있는 북한 영사관 직원들이 사할린 섬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전하며 북한 국적을 취득할 것을 권유하였다. 남한 출신인 동포들은 이를 망설였으나 결국 북한 국적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소련 국적을 취득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가 몰래 북한 국적으로 올려놓았다.

정장길씨는 북한 정부에 탄원도 내어보았지만 북한이 이를 허가할 리 없었다. 유엔에도 편지를 보내 호소했다. 차라리 무국적자가 되기를 원했다. 어느날 경찰이 골치아픈 존재인 그를 불러 마침내 북한 국적을 버리고 다시 무국적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사할린에서 10년간 조선인 학교를 다녔다.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 과목이 더 있을 뿐 모든 교과서가 한글로 되어 있었다.

기자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1976년에 부인과 함께 남의 여권을 빌려 사할린 섬을 빠져나와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까자흐스탄으로 갔다. 우즈베키스탄, 까자흐스탄에는 1937년 스딸린에 의해 연해주 등지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과 그 2세들 30여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페레스트로이카) 정치가 실시되자 이주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1989년 까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발행되는 한글신문 ‘레닌 기치’(현 고려일보)에 실린 한 고려인의 당시 회상을 옮겨본다.

원동에서 강제적으로 이주당한 조선인들은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모르면서 허술한 화물차량에 실려 갔다. 이주에 대한 아무런 해석사업도 없이 이주꼬미씨야가 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주기간을 정하고 일명당 150루블리씩 보조금을 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때 신한촌 하바롭쓰까야 거리에 살았는데 3일부터 떠나가는 열차들을 다 전송하고 10월 11일에 떠났다. 나는 전송할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과 슬픔만을 보았을 뿐이다. 노인들은 고향땅 친척들의 묘지의 흙을 수건에 싸가지고 떠났다.

열차에 변소가 없는 관계로 정거하는 역들은 변소로 변하여버렸다. 화물차량마다 40여명씩 싣게 되었으니 특히 식사문제가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경, 학질, 설사, 수질, 토질 등으로 죽었는가? 특히 어린이들이 많이 죽었다. ....... 살림집들이 없었다. 가을의 스산한 바람, 하늘 밑에서는 살 수 없었다. 우선 어린이들을 살려야 했다. 추위는 사정이 없었다. 게다가 적리, 학질 등과 같은 질환들이 심하여 우선 어린이들이 많이 죽었다. 죽은 어린이들을 장례할 나무조차 없었다.

연해주 17만 한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강제이주 당시 150루블의 보조금을 지급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집과 논밭은 물론 온갖 가재도구를 포기해야 하는 대가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의 보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든 땅에서 강제에 의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심정은 금액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벼농사까지도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되었다. 이는 당시 소련당국이 추진하던 집단농장(깔호즈)과 쉽게 접맥이 되는 것이었다. 성공한 집단농장은 대부분 고려인들이 이룩한 것이었다.

“농사에 관한 한 고려인들이 최고였습니다. 당시 까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이 160여명 배출되었습니다”

이주 당시 극동의 소련 영내에 거주하는 한인 17만여 명을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로 쫓아 보냈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이 일본을 지원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전에 민족 지도자와 지식인, 이주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인사 2800여 명을 체포해 총살했다. 한편으로는 식량부족국가인 소련이 농사 기술이 뛰어난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데려와 농사를 짓게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미르 고원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아랄해로 흐르는 시르다리야 강물을 이용해 관개를 하고 비행기로 볍씨를 뿌렸습니다”

농사기술 최고 고려인들, 수많은 노력영웅 배출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있는 아랄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로 염호이다. 남한 만한 넓이의 이 호수 북으로는 카자흐스탄이 있고 남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이 있다. 이 호수로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는 시르다리야 아무다리야('다리야'는 터어키어로 강이라는 뜻임)의 큰 강이 흘러들고 있다. 이 곳은 연강수량 500mm 이하의 스텝기후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며 예로부터 유목민들이 말을 달리며 드넓은 초원을 누비며 살아온 곳이었다.

그러나 파미르 고원의 만년설이 여름이면 녹아내리기 때문에 두 강의 수량은 아주 풍부하여 사막에 가까운 건조지대를 적시고도 아랄해로 흘러들 정도였다. 그런데 강물이 관개에 이용되면서 아랄해는 말라가기 시작하였다. 호수 동쪽에서는 호안선이 약 100km나 후퇴해 있고, 아랄해의 면적은 6만6400㎢(1960년)에서 2만5200㎢(2001년)로, 수량은 1056㎦(1960년)에서 169㎦(2001년)로 감소했다. 면적은 40년 전의 38%로, 수량은 16%로 줄어 버린 것이다.

말라 버린 호수 바닥에서 대기로 치솟아 올랐던 소금먼지가 눈처럼 떨어져 내리거나 바람을 타고 흩날려 주변의 토지가 급속히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

“모래 바람이 불면 눈을 뜨기도 어렵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와 머리를 털면 모래가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곳의 모래가 북극해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장길씨는 알마아타로 와서 1938년에 창간한 한글신문인 ‘레닌 기치’에서 기자로 일하는 한편 국립 까자흐스탄 대학교 신문방영학과에 입학하였다. 10여만의 고려인이 살고 있던 당시 이 신문은 11,000부 정도 발행하였으며 소련정부가 무너진 후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꾸어 현재 2,000부 가량 발행한다고 전했다.

이 신문의 하급기자로 입사한 정장길씨는 상급기자, 공업부장, 선전부장, 국제보도부장, 제1부국장까지 역임했다.
이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그는 시를 발표하였으며 산문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 산문집이 펜클럽 한국지부와 해외동포재단이 주최한 공모전에 당선돼 펜클럽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연간 5만원의 회비를 납입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펜클럽 한국지부에서는 나중에 한꺼번에 회비를 납입하면 된다고 하였으나 이후 한국에 와보니 회원명부에서 사라졌다며 그는 서운함을 표했다.

1992년 소련 공산당이 무너진 이후 그는 까자흐스탄공화국 부통령을 수행하여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비록 모국의 품에 안겼지만 이로 인해 이산가족의 슬픔을 겪고 있다. 45년도 이전에 태어난 사람에게만 혜택이 주어져 자녀들과는 생이별을 한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 온 동포들 대부분이 이런 아픔을 겪고 있다. 그에게는 현재 까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딸이 있고 아들은 독일에 살고 있다. 이들을 만날 길은 요원하다.

자식들과 생이별한 모국행

현재 그는 3부작 ‘한국 일본 사할린 연해주 만주 중국 중앙아시아에서의 생활’이라는 내용의 대하소설을 집필 중이며 90% 정도 가량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수화물이 20kg 이상이면 운송료를 kg당 14,000원을 더 내야 해서 대부분 알몸만 빠져나왔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소설은 만주, 시베리야 등지의 독립운동을 무대로 펼쳐지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가 곁들여져야 합니다. 6년동안 국립 까자흐스탄 고문서 보관소를 드나들며 수집한 자료를 대부분 그냥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이번에 서천에 온 동포들이 농사라도 지으며 소일거리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서천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인텔리 층이어서 농사 짓기를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 연해주에서 처음 이주한 고려인들이 살았던 까자흐스탄 우슈토베, 1937냔 10월 9월부터 4월까지 이곳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고 적혀있다.

 

 

<허정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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