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 있어서 풍수지리 사상은 하나의 세계관이자 종교였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줄기의 흐름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산의 모양이나 물의 흐름을 동식물이나 사람 또는 물질에 비유하는 데 이를 형국론(形局論))이라 한다.
서천군에 ‘부내복종(府內伏鐘)’ 형의 대명당이 있다고 한다. 마을 안에 종이 엎디어 있는 형국이라는데 종천이라는 지명과 부내초등학교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부내복종에 대해 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해온 권혁구(68)씨를 만났다. 그의 사무실은 부내복종의 혈처가 있다는 종천면 화산리 화산 기슭에 있다. ‘부내복종연구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산 아래 장구만을 가리키며 그는 “장구만의 물문을 터야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역수(逆水)로 오는 물이 기가 가장 셉니다. 그런데 판교천 하구를 막아 기를 차단했습니다. 막힌 기를 뚫어주어야 합니다.”
그는 농사철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비수기 때에는 판교천 배수갑문을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금강하굿둑과 새만금방조제도 개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서해로 흐르는 모든 강줄기를 막아 이에 따른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고 한탄했다.
부내초등학교 학생들이 부내복종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찾아오자 그는 “4대강 사업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는 것부터 설명해 주었다 한다.
“수나라가 대운하 공사로 결국 망하지 않았습니까? 산천토지를 잘 가꿔야 나라가 흥합니다”
육군 군악대 출신으로 서천읍에서 예식장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가 풍수지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개간하던 국유지를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고부터였다. 바로 그의 집안이 일구던 산밭에 부내복종의 혈처가 있다 말을 들었던 것이다.
풍수는 집짓는 일이나 마을 터를 잡는 양택풍수와 묘자리를 보는 음택풍수로 나뉜다.
조선조에 와서 음택풍수로 기울어진 것을 두고 권씨는 음택풍수가 발복이 빠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풍수에서는 산천을 파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고려조 충렬왕 때의 일이다. 왕이 중국의 궁궐처럼 크고 높은 집을 지으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다.
“산이 드물면 높은 집을 짓고 산이 많으면 낮은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만일 높은 집을 지으면 반드시 쇠퇴할 것입니다.”
이러한 풍수적 관념에 따라 높은 집을 짓지 않고 주위의 자연에 어울리려 했던 전통은 조선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남산성의 철탑도 반드시 이전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