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인·간·관·계
  • 장인식 칼럼위원
  • 승인 2011.10.31 11:37
  • 호수 5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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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흔해졌다.
웰빙이니 로하스니 하면서 요란스럽기까지하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죽음까지 운운하고 있다. 아마도 생존과 자유를 위한 몸부림이 여유와 행복추구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삶의 방법에 있어 보인다. 흔히들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을 곱씹어 보자면 나름대로의 궤변(詭辯)도 가지게 된다. 바로 인정인색(認定吝嗇)이다.
남다른 포용력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해주려는 마음보다는 시기와 질투, 오만과 편견, 책임전가, 미움과 분노 등 다소 믿음결핍에 의한 가식(假飾)이나 꼭 이겨야 한다는 게임선상에서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서 시작되고 있다면 아마 이는 큰 불행이자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더 크게 외치고 있다.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아님 이것저것을 포기한 채, 돈이나 권력, 향락에 몰두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면서 차츰 자기 자신에겐 관대해지고 남에겐 인색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스스로에게 갇힌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지도 생각해 본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는 하지만  바로 지금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찾아보니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라틴어의 뜻과 흡사해 진다. 현실을 직시하여 자기 분수를 알고 푼수가 되지 말자는 뜻이다. 즉, 자족(自足)할 줄 아는 삶, 그것도 객관 타당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꿈과 희망을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러한 미래들도 충실하고 탄탄한 현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풀이이다.
그리고 표현도 현실적으로 바꾸고자 한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가장 세련되게 추구하자」로 말이다. 자기 몸 하나도 못 챙기면서 남을 챙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위선(僞善)이다.
내가 좋아 나면 남도 좋아할 것이고 내가 싫어하면 남도 싫어 하겠다는 의식전환부터 시작해야겠다. 항상 엇박자로 생활하면서 나를 이해해 달라고 응석을 부리지도 말아야겠다. 또한 예의와 질서로써 객관적인 입장에서 세련되게 생활해야겠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곳부터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주위와의 좋은 관계를 맺는 지혜부터 가지고 싶다. 본래 인간(人間)이란 언어를 가지고 생각할 줄 알고 무리를 이루어 사는 고등동물 아닌가? 혼자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음부터 인정하자. 관계(關係)라는 단어도 사전을 찾아보니 만남, 영역, 통정(通情), 참견, 이유 등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다짐해본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고, 분업과 협업의 지혜를 갖자고, 아는 만큼 보이기에 열심히 듣고 배우자고, 마음을 잠그지 말자고, 응석받이가 되지 말자고,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한(恨)과 정(情)을 구별하면서 살아가자고, 그래서 세련된 자존감을 가져 보자고 말이다.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생각과 말, 행동을 바꾸려 한다면 습관과 가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다고 알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긴 하지만 오늘 역시도 넉넉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남다른 각오로써 맞이해본다.
그런데 바보는 항상 다짐만 한다는데 걱정부터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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