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명창 이동백(李東伯)과 서천과
특별기고 - 명창 이동백(李東伯)과 서천과
  • 뉴스서천
  • 승인 2003.01.30 00:00
  • 호수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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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 / 소설가
재인(才人)소리꾼 하나가 비인(庇仁)어딘가에서 살았다는 것은 알지만 명창 이동백(李東伯)이 서천 출신이면서 근대 판소리 5명창(송만갑·이동백·김창환·유성준·정정렬)중 하나인 것을 알고 있는 서천인은 몇이 되지 않는다.
언제인가 아마 2년쯤 되었을 것이다. ‘서천8경’ 인가를 지정하는 얘기를 몇이 모여서 하게 되는 자리라며 군 회의실에 오라 하여 가본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종천(鐘川)의 희리산(希夷山)을 8경의 하나로 했으면 좋겠다 했다. 필자가 즉각 동조했다.
“그 산 좋고 말고이다. 산경(山景)이 명미(明媚)할 뿐 아니라 산하의 도만리가 명창 이동백이 태어난 마을이고 그 산이 바로 그가 독공(獨工―목 훈련을 위해 소리를 내지르며 혼자서 하는 소리공부)한 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진작에 반드시 세웠어야 했는데도 못 세운 그의 ‘소리비(碑)’를 거기에 세우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겠다. 우리 서천은 너무 양반군(郡)이라 그만큼으로 양반이 아닌 쪽의 문화는 뒤진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쉬운 예로 5명창 중 4명창은 모두 전라도 출신들이라 그들의 고구(故丘)에 묘(墓)들만도 왕릉만큼씩하고 고장 도처에 소리비들이 서 있는데 이동백만이 재수가 없어서 서천출신이 되어 왕릉은 그만두고 그가 사후 어디에 묻혔는지조차도 알 길이 없고 소리비는 그만두고 묘전의 단갈(短碣)이나마도 구경할 길이 없는 것으로 그렇다.”
필자의 말이었지만 그 후 그곳에도 그 밖의 어디에도 이동백의 소리비가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아는 일이다. 일개 상인(常人) 소리꾼에 비는 무슨 비냐가 우리 서천의 문화수준이다. 상인 소리꾼의 그것이 아니라도 서천의 그와 같은 뒤진 문화수준은 도처에 나타난다. 이웃 홍성(洪城)에 ‘한용운(韓龍雲)제’가 있고 그 위 예산에 ‘추사 (秋史 金正喜)제’가 있고 그 위 아산에 충무공의 ‘현충사(顯忠祠)’가 있고 부여·논산·공주에는 더 많은 유사한 제전(祭典)들이 있는데도 유독 서천에 ‘월남제’가 없는 것으로도 알게 되는 일이다. 석초(石艸)의 생가터가 밭으로 빈터가 된지 오래인데도 그의 생가 복원이 없는 것도 같다.
이동백이 금년 3월의 문화인물로 지정되었다. 물론 정부에서다. 서천에서는 으레 잿놈 소리꾼쯤으로 밖에는 보지 않고 있다가 된 일이다. 마치 주변에서 월남(月南)얘기를 하니까 서천의 어느 한 기관장이란 사람이 “월남이 뭐랴? ”했다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이동백 명창의 문화인물지정에 군이나 문화원에서는 무슨 낯으로 그를 위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가 보고 싶은 일이다.
가정마다 자녀의 교육은 하고 있을 것이니 우리의 음악이 서양에서 온 것인가 자체에서 나온 것인가는 알아야 할 것이고 아는 대로는 가르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 것은 천시하고 미국 것만을 높이 보는 요즘이다.
특히 적벽가(赤壁歌)의 새타령 대목과 춘향가 중 옥중비가(獄中悲歌)대목의 귀곡성(鬼哭聲)은 이동백의 특장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통정대부(通政大夫)가 고종(高宗)이 내린 그의 벼슬이고 고종 인산(因山)때는 우리나라 명창중 그 하나만이 조문 입궐(入闕)이 허락되기도 했다.
사람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산다. 밥으로는 잠깐 사는 것이고 오래 후손만대 살게 하는 건 문화다. 서천이 ‘충청도양반’보다 그것을 먼저 알았으면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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