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권력에게 받는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운명
불의한 권력에게 받는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운명
  • 서천성당 주임 신부 김용태 마태오
  • 승인 2013.12.21 11:29
  • 호수 6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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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다 참수 당했다. 예수님은 모진 고문을 당한 후에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었다. 그보다 훨씬 앞서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도 모진 박해를 받고 죽거나 쫓겨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 예수의 뒤를 따라 모진 박해와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하나 같이 당시의 권력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권력자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을 비롯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증거하는 이들을 미워하는 걸까?
그 이유를 복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4-5)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의 내용들이다. 이는 이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펴 드시고 선언하셨던 그 말씀의 실현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렇다면 이 내용이 뭐가 어떻길래 권력자들이 그렇게 싫어했을까? 다 좋은 내용 아닌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권력자들이 왜 싫어했을까?


복음의 이 내용을 가만히 보자. 이 내용은 결코 의학적이거나 생체학적인 내용 혹은 사회복지학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걷고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는다는 것이 안과나 정형외과나 피부과나 이비인후과에서 이루어지는 의학적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사회복지 차원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내용은 다분히 정치사회학적이다. 눈먼 이들이 보게 하고 귀먹은 이들이 듣게 한다는 것은 멀쩡한 사람을 눈멀게 하고 귀먹게 하는 세력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는 말이다.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에 심한 불균형을 초래하는 온갖 탐욕스런 권력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는 말이다.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타락시키는 온갖 부정부패와 불의한 가치들에 항거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게 한다는 말은 멀쩡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땅의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항거가 담겨 있는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사람의 삶을 궁핍하게 만드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세력들에 대한 항거가 담겨 있는 말이다.


예수님은 혁명가이시다. 돈과 권력으로 내리 누르는 이 세상의 가치질서를 허물고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가치질서를 새로이 확립하는 하느님 나라의 혁명을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을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불의한 권력자들이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박해당하는 거다.


예수님은 다분히 정치적인 일을 하고 계셨다. 복음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란 다스리는 일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다 살리는 일을 의미하고, 복음이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 곧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내용이니 결국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란 세상살이에 하느님의 정치, 하느님의 다스림을 펴는 일과 같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그리고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정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실 때도 정치범으로 처형 당하셨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순교선열들 모두 한결 같이 정치범으로 처형당했다.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운명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진실과 정의를 두려워하고 사랑과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환영을 받는다면 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환대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빛의 자식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어둠이 만연한 이 시대,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독재를 자행하는 이 시대, 서민경제를 외치면서 재벌들 주머니만 불려주는 이 시대, 평화통일을 외치면서 종북몰이에 여념이 없는 이 시대에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려면 각오해야 한다. 성당에는 다니지만 불이익은 당하기 싫은가? 누구에게나 좋은 소리만 듣고 싶은가? 거부당하기 싫은가? 누구에게나 환대 받기를 원하는가? 출세 성공해서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세속 권력자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두려운가? 이것저것 신경 쓸 거 없이 마음의 안정만을 추구하며 조용히 성당만 다니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애초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 여덟 가지를 봐라! 그게 얼마나 고달픈 삶인지! 하지만 그게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은 참 어리석어 보이고 바보처럼 보이고 불행해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실은 가장 성공한 사람이고 가장 위대한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역설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크고 내가 제일 높다고 자랑질 해봤자다. 복음을 실천하지 않는 자, 하늘나라에서 멀리 있는 자들은 그저 먼지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은 하느님이 전부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전부인 사람이지 세상살이가 전부인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차지할 몫은 결국 하느님이어야 한다.


그러니 선택하라! 결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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