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사랑, 금강 사랑, 인간 사랑!
서천 사랑, 금강 사랑, 인간 사랑!
  • 뉴스서천
  • 승인 2002.02.28 00:00
  • 호수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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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8경 일곱번째 이야기
1990년 바다와 강으로 나누기 전, 금강 하구의 이름은 많기도 했다. 백제시대에는 기벌포, 고려시대에는 진포,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이다. 금강하구는 그 이름만큼이나 많은 역사를 담고있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전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바다에서 사비성으로 진입하는 첫 전략적 요충지를 기벌포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망한 다음, 왕자 풍, 복신, 도침 등이 주류성에서 백제부흥 운동을 전개할 당시 일본 원병과 나당연합군이 싸움을했던 곳도 기벌포이다. 또한 676년 신라가 당나라의 야심을 격퇴한 곳도 내륙은 매소성이며바다는 기벌포이다.
그러나 1999년 한산 건지산성이 백제시대 산성이 아니고 고려후기에서 조선초에 축성된 산성으로 발표되면서 주류성과 기벌포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전개되고 있다. 주류성과 기벌포를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주류성이 한산 건지 산성이 아니라면 기벌포도 금강하구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국정교과서에는 아직도 기벌포를 장항으로 표기하고 있지만이를 뒷받침할 주류성을 찾는 일이 긴요하다. 그래야 서천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기벌포가역사적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을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금강하구를 진포라고 불렀다. 고려사를 참고하여 왜구의 침입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민왕 7년(1357) 4월 왜구가 금강하구를거슬러 올라와 韓州(한산)에 침입 하였고 우왕 2년(1376) 10월 왜구가 진포에 출현하였다. 또 韓州(한산)에 침입하였는데 최공철이 이를 쳐 백여명을 참살하자 우왕은 그에게 술과 말을 주었다. 우왕 4년 3월 왜구가 林州(임천) 韓州(한산)에 침입한 사실을 비롯하여 많은 사건들이 기록되고 있다. 이 중 우리에게 알려진 왜구 침입중 최무선, 나세 심덕부 등이 진포에서 승리한 해전은 우왕6년(1380)이다. 이를 진포해전이라 한다.
진포해전은 1380(우왕6) 년에 왜구가 500여척의선박을이끌고 금강하구의 진포를 쳐들어 왔을 때 최무선 등이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싸워 격파한 해전이다.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 곳이 진포이다. 그럼 진포는 어디일까 하구둑를 건너면 군산 시민공원에 진포대첩비가 우뚝서 있다. 진포는 군산이라는 것이다. 군산에는 지금 진포중학교, 진포식당, 진포사진 등 상호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진포가 군산이며 동시에 군산과 장항을 합쳐 진포광역시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럼 우리는 진포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서천지역에는 나주나씨 문중에서 1996년에 세운 고려해도 원수 나세 진포대첩비가 하구둑 관광지 전망대바로 아래에있다. 이 비석은 굉장히 중요한의미 있는 비석이다. 물론 세울당시 비석이 내용이 잘못되어 이견이 있었지만 나주나씨 문중이 주체가 되어 이 비를 세우려고 노력한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한다.
나세 장군은 최무선과 함께 진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지금 마서 지역에는 많은 나주나씨들이 세거하여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나세의 후손들이 진포 대첩을 기리고자 노력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자랑할만한 사건과 발전이 금강하구에서일어나는 날을 다시한번 기대해보고자 한다.
지금 천리를 달려온 금강물이 꽉 막히는 곳이 금강 하구 둑이다.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외쳐도 보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난 금강물이 안개를 일으켜보기도 하고, 많은 토사를 끌고 내려오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반응이 없다. 이제 금강은 우여, 참게, 뱀장어 수를 줄이고 있다. 벌떼같이 모여들던 철새들도 그 수의 다양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청둥오리, 고니 몇 종류의 철새만이 자리를 옮겨가며 금강을 점령하고 있다. 뭔가 금강 하구가 변화하고 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도 변화하고 있을 텐데 자신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에는 조수의 흐름에 따라 토사가 밀려오기도 하고 다시 가져가기도 했다. 내륙의 풍부한 영양분이 바다로 공급되기도 했으며 바다로부터 많은 물고기가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뱃길을 따라 많은배들이 강경, 부여, 공주, 부강까지 오르내리곤 했다. 자연의 조화에 의하여 금강이 정화되고우리는 금강을 통하여 삶을 지켜왔다.
이런 금강을 보고 있노라면, 기벌포와 진포에 대한 논쟁보다금강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백제의 기벌포도 고려의 진포도 오늘날 금강하구도 옛 모습은 아니다. 그 역사의 현장이 군산과 서천의 어느 한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천리를 달려온 금강물과 서해가 만나는 금강하구가 기벌포요 진포이다.군산 문화와 서천 문화가 만나는 곳이 기벌포요 진포이다. 누가 기벌포의 주인이고 진포의 주인이 아닌가? 누가 더 금강하구를 사랑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역사의 현장이며 삶의 질곡이 있었던 금강하구를 보다아름답게 만들어, 우리가 꿈꾸는 개발과 보존의 논리가 실현됨으로 환경의 역사를 다시 쓰는 기벌포, 진포, 금강하구의 역사, 철새의 요람이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 서천 사랑이요. 금강사랑이요. 인간 사랑이다.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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