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동백대교’ 명칭 유감
데스크칼럼/‘동백대교’ 명칭 유감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5.10.31 13:16
  • 호수 7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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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면과 문산면의 경계인 놋점이고개에서 판교천과 길산천의 수계를 가르며 오석산으로 내려온 지맥이 남산으로 건너 뛰어 서태산-송내리 구절마을-송내 삼거리-왕재산을 거쳐 금강을 만나 멈춘 곳에 용당산이 있다.
용당산이 있는 현재 원수리는 백제 때에는 설림군 소속이었고 신라와 고려 때에는 서림군에 속했다. 조선 태종 때 서천군에 속했으며 조선 말에 마길면 소속이 되었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여리(水餘里), 원모리(元毛里), 굴항리(屈巷里), 위포리(蝟浦里리), 용당리(龍堂里)를 합하며 수동리(水東里)라 하여 마동면에 속하게 했다. 1938년 장항읍에 편입되었다가 광복 후 원모리와 수동리의 이름을 따서 원수동이라 했다가 원수리가 되었다.
용당산은 용의 머리이고 성주리 쪽으로 올라가는 맥은 용의 몸통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도로를 내면서 잘라냈다. 용의 머리가 잘린 것이다. 그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 용당산인데 당집이 있었다. 그래서 용의 머리에 당집이 있다 해서 용당이란 이름이 나왔다. 그 용당을 여기 사람들은 용댕이라고 부르고 있다.
장암리의 전망산과 장암진성이 군사적 요충지이자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용당포는 해양문화와 내륙문화가 만나는 접점이었다.
용당산은 용왕제를 지내던 당집이 있는 곳이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에도 기록되고 있는 용당진사(龍堂津祠)는 바로 이를 가리킨다. 백제시대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정부가 주관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용당단’이라는 제단이 있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웅진명소(雄津溟所)로 지정돼 용왕제를 지냈으며 웅진에서 향과 축문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전한다. 지금도 정월 초에 장항 물량장에서 풍어제를 지낼 때면 용당산에 먼저 올라 제를 지내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원수2리 용당산 아래의 마을이 용당리였으며 이곳에 있는 용당진, 또는 용당포는 서천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예로부터 군산을 오가는 나룻배가 있었으며 1960년대 초까지 도선장은 이곳에 있었다.
용당산을 중심으로 용당진, 또는 용당포는 서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군산 왔다갔다 하는 도선장이 여기에 있었다. 배 3대가 왔다갔다 하면서 60년대 초까지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포구 주변에는 색시집도 있었다. 용당포는 장항의 중심, 서천의 중심가였다. 금융조합도 여기에 있었고 장항중학교 자리에 시장이 들어섰다. 지금도 구장터라고 하는데 장항중학교 담 뒤가 장터였다. 어선이 닿고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주변은 천혜의 어장이었다. 참게, 황복, 뱀장어가 지천이었다.
나룻배와 어선으로 분주했을 용당진은 현재 감축하는 어선을 파쇄하는 장소로 변해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용당진 상공으로는 군산을 잇는 다리 공사가 거의 완공 단계에 있다. 최근 서천군과 군산시는 이 다리 이름을 ‘동백대교’로 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충남도와 전북도에 건의했다고 한다. 백강전투, 기벌포대첩, 지포대첩 등 역사 현장 금강하구에 놓이는 다리 ‘동백대교’라는 이름에는 아무런 역사성도 없다.
번성했던 옛 마을 ‘용당대교’로 살아남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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