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에세이 - 우 산
독자에세이 - 우 산
  • 뉴스서천
  • 승인 2003.07.25 00:00
  • 호수 1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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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겨울과 여름 가운데 어느 계절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겨울이 좋다고 한다.
어린 시절 여름은 나에게 어려웠던 추억이 있다. 그 중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학교를 다녔던 일이 떠오른다. 시멘트나 비료포대를 쓰고 갈 때도 있었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처음부터 비를 맞고 달려서 갔다. 이게 안타까웠던 어머니는 도롱이와 삿갓을 준비 해놓으시고 쓰고 가기를 권하셨지만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모습이 친구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 같아 어머니의 한숨을 등뒤에 남겨 놓은 채 등교하곤 했다. 비를 맞아서 옷과 책은 젖었지만 친구들에게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면 씁쓸한 추억이지만 아름답게 기억된다. 그렇게 나를 아껴주시던 어머니도 몇 해전 세상을 뜨고 안 계시니 나 혼자 불효를 후회할 뿐 다시는 살아서 만나지 못할 어머니가 어린 시절 추억과 더불어 한없이 그립다. 올해는 장마가 일찍 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비 오는 날도 많아서 우산을 가지고 나가는 날이 많다. 옛날에 그렇게 귀하던 우산이 지금은 현관에 가족수의 몇 배나 되게 보관돼 있다. 그런데 이런 우산이 어느 것은 한해가 다 가기 전에 살이 부러지는 경우가 있다. 옛날 같으면 고쳐 쓸 수 있는 것을 지금은 거의 버린다. 우산 값을 올려 받더라도 우산살이 부러지지 않도록 잘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우산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인도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상아 자루에 금박이를 해서 왕이나 귀족들의 신분과 위엄을 나타냈다고 하며, 프랑스 루이 13세는 금은으로 레이스를 달아 장식한 우산을 다섯 개나 소유했다는 기록도 있다. 박쥐우산이 제작되면서 19세기 중엽이후에 일반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대중화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시대 때부터 왕의 햇빛 가리개로 사용해 왔고 조선조에 와서는 왕과 관리들이 긴 자루에 비단을 둘러서 일산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농부들은 도롱이와 삿갓을 사용 해왔고, 선비들은 길을 나설 때 우립을 준비했다. 지금은 우산이 흔한 세상이니 누구라도 조선시대 관리정도의 신분은 갖추었다고나 할까?
우립에 관한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조선조의 호조판서자리는 일년내외면 바뀌는데 영조조의 정홍순이라는 분은 호조판서를 십년이나 넘게 지낸 분으로 어려서부터 매사에 깐깐하고 정확했다. 그가 등과 하기 전 선비로 있을 때 왕의 행차를 구경하러 나왔다 갑자기 비가 내리자 준비한 우립을 쓰고 구경했지만 옆의 한 선비가 우립이 없어 당황해 우립 하나를 빌려 주었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사흘이 지나도 그 선비는 우립을 돌려주지 않았다. 정홍순이 찾아가자 그 선비는 먼데 친척이 와서 빌려 주었으니 사흘 안으로 돌려주겠다고 했다. 사흘이 지났지만 우립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그 선비를 찾아갔을 때는 언짢은 표정으로 그까짓 헌 우립 하나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고 하면서, 새것으로 사서 보낼 테니 그냥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헌 우립이 아니라 내가 그대에게 빌려준 신의를 찾으러 온 것이오”하며 그 친척집까지 찾아가 우립을 돌려 받았다. 훗날 호조판서가 된 정홍순에게 새로 부임한 호조정랑이 인사차 찾아왔는데 자세히 보니 옛날 우립을 빌려 쓰고 약속을 어긴 그 선비가 아닌가? 나라의 모든 살림을 도맡아 관리할 호조정랑 자리에 저런 신의 없는 선비는 쓸 수 없다고 판단한 정홍순은 그 선비를 파직하여 돌려보냈다.
헌 우립과 신의! 오늘날 공직자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곰곰이 되새겨 볼일이다.
<서천읍 군사리 김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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