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꿈꾸는 겨울
■모시장터/꿈꾸는 겨울
  • 최용혁 칼럼위원
  • 승인 2017.12.20 16:54
  • 호수 8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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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혁 칼럼위원
가을 들판을 지난 햇살은 돼지 꼬랑지만큼 짧아졌습니다. 탱글탱글하고 광택이 나는 알곡들을 다 들이고 나니 산과 들은 점점 무채색으로 변해갑니다. 김장까지 마치면 이제 채워 넣어야 할 것들은 거의 다 들여 놓은 셈입니다. 화려한 잎과 깃과 미사여구를 다 버리고 세상은 한 점을 향해 안으로 안으로 알맹이만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온전히 내 것으로만 세상과 맞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을 준비하라고 매년 시간이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자, 보자, 너 올 한 해 어떻게 살았니?”
‘난 올 한 해 얼마나 뜨거웠던가, 얼마나 냉철했던가, 얼마나 정진했던가’ 답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보여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요? 무엇부터 보여줘야 할까요?

가슴 벅찬 기억도 많습니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만 올 한해도 심고 거두고 키우면서 닥쳤던 어려운 시간들을 무사히 이겨낸 것이 내심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농민회에서, 마을에서 형님, 아우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이루어 낸 일들을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런 일들을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뿌듯했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모르던 것을 깨달음처럼 알았을 때, 한 권의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오래된 친구들과 먼 여행을 떠났을 때, 커가는 아이들과 영혼의 대화가 이루어질 때, 가슴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훨훨 나는 새처럼 훨훨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 떻. 게. 살. 았. 니. 하는 말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온통 “올 한 해 얼마 벌었냐?”는 문답으로 연말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질문이 거듭될수록 고개는 숙어지고 손은 빈약한 통장만 만지작거릴 수도 있겠습니다. 시간이 묻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서 매년 우리가 해야 하는 답은 인생의 마지막에서 내가 나에게 묻는 질문과 닿아 있을 것입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길 수 있는 말입니다. “돈 좀 더 벌어라, 공부 좀 더 열심히 해라. 남들보다 더 잘 되라.”는 말과는 다른 성격의 것입니다. 아흔을 넘긴 할아버지의 “사랑해.”와 같은 말, 백남기 농민이 딸들에게, 이용마 기자가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말을 들어 보고 생각해 보면 우린 좀 더 편하고 당당하게 이맘때를 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 모아 놓은 것들이 더욱 단단하게 영글어 씨앗 한 알이 되는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통장의 잔고처럼 확실하게 찍힐 일은 없겠지만, 언젠가는 온 우주를 품을 씨앗 한 알을 만들기 위해 온전히 내가 가진 것만 가지고 시간의 물음에 맞서 대답해 보겠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동지입니다. 하나의 양이 비로서 시작된다는 극음의 절기에 단단한 꿈 하나를 빚어 보겠습니다. 땅처럼, 나무처럼 계절과 함께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 농민입니다. 농민이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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