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현 역사 바로알기
비인현 역사 바로알기
  • 뉴스서천
  • 승인 2003.10.31 00:00
  • 호수 19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과 중국의 이곳저곳을 다녀보면 문화재나 역사적 고적들이 매우 과학적으로 보존되어 옛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마도를 10회 이상 다녀오면서 학자로서 필자가 감동받은 것은 삼국시대 정치적 변화를 겪으면서 백제의 멸망 등 의 이유로 정치적 망명지가 되었던 아소만에 백제성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는 것과, 도굴이나 채굴되지 않은 흔적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려시대 역사를 보면 중국의 원나라와 고려가 합작하여 일본을 침략하였다가 태풍으로 실패한 기록이 남아 있다. 대마도에는 원나라와 고려군이 침입한 곳에 신사를 세워 지금까지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필자가 고등학교 교사 시절, 경주 수학여행을 다녀 보면 우리나라에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여 불타고 무너진 흔적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실과 추상적인 모습만을 설명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서천군 비인현의 역사가 있다. 세종 때 이정무가 대마도를 정벌하게 된 이유는 1419년 5월에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은 즉각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정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종무가 휘하에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오른 것은 한 달 뒤인 1419년6월19일 이었다. 이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 군사는 1만 7천여 명이었고, 식량은 65일분이 준비되었다. 이정무 부대는 대마도에 침입하여 129척의 선박을 노획하여 쓸만한 20여척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으며 가호 약 2천호를 소각하고 적군의 수급 114급을 침수하였다. 정벌과정에서 좌군절제사 박실이 이끄는 부대가 복병을 만나 한때 고전하기도 했으나 왜구측 평화협정 제의로 그해 7월3일 거제도로 철군 하였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수십 년간 계속되었던 조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고 대일 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관광객들 중에 대마도는 우리나라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그래서 대중가수의 노래에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지 않았나 한다.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인식이 청소년들에게 철저히 교육되어야 미래의 우리의 역사도 올바르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교육자들이 먼저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