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채송화 연정
■ 모시장터-채송화 연정
  • 칼럼위원 신웅순
  • 승인 2019.07.16 21:39
  • 호수 9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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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내 본 집, 둔산동으로 이사를 했다. 말년을 보낼 집이다. 십여년 동안 전세를 내주었던 집이라 이것 저것 손 볼 게 많았다. 그동안 정신없이 사느라 불필요한 물건들이 수북이 쌓였다. 수십년을 묵혀둔 것들도 있고 한번도 쓰지 않은 물건들도 있었다. 집사람이 과감히 버렸다. 십여년 이상을 써왔던 세탁기, 냉장고도 버렸고 장롱도 버렸다. 몸집을 줄이고 나니 육신과 영혼이 날아갈듯했다. 특히 베란다에는 화분 몇 개만 놓았을 뿐 빨래 건조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았다.

“여보, 난 채송화가 좋은데.”

며칠 전 아내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얼마 후 채송화 한 분을 사왔다. 내 말을 기억해둔 모양이다. 빨강색과 노란색 그리고 하얀색 세종류였다. 그래도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내 밖에 없다.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 분꽃은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하는, 눈물 글썽이게 하는 고향의 꽃이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 어효선 작사

70년대초 초등학교 선생할 때 풍금을 치며 아이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이다. 붕어 같은 입술로 내 풍금 소리에 맞춰 불렀던, 지금은 다 오십도 훌쩍 넘었을 제자들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새삼 고향 제자들이 생각난다.

누구나 다 한가지이겠지만 나는 어릴 때 꽃밭 가꾸기를 좋아했다. 담벼락을 뒤로 하고 타원형으로 둥글게 돌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거기에 막대를 세우고 새끼줄로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꽃밭에는 채송화,봉숭아,백일홍,나팔꽃,과꽃,코스모스 등을 심었다.

채송화는 작지만 예쁘고도 앙증맞다. 여름 한낮 작렬하는 햇살 아래 피어있는 빨간 채송화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면서 한없이 겸손한 작은 성자 같기도 하고 창밖을 바라보며 깨금발을 딛고 선 앙증맞은 손녀 같기도 하다. 그 옛날 꽃밭에서 보았던, 그 여름 햇살 아래 피었던 그런 채송화를 다시 보고 싶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나 생각은 언제든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아내에게 봉숭아도 얘기했는데 베란다에서 키우기에는 좀 거추장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내는 채송화 분을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놓았다. 이제 조석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늑했던 고향집을 생각하며 잠시라도 순수한 어린애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정화는 별도로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채송화야 나와 인연이 되어주어 고맙구나.”

“내가 널 잘 키워 씨를 받아 지인들에게 고향의 향기를 나누어주마.”

아내가 사온 채송화 분 하나가 내게 은은한 기쁨을 주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행복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 내 누이가 생각난다. 고향집 뒤곁은 야단맞을 때나 힘들었을 때 소리없이 울던 곳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뒷베란다가 그런 공간이 아닐까 싶다. 여기는 채송화가 있는 고향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내가 야단이야 치겠냐만 이제는 거기에서 먼 산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베란다를 아무 생각이 없는 무의 공간으로 만들야겠다. 소확행이 이런 것일 것 같다.

-석야 신웅순의 서재,매월헌

작년에 내 본 집, 둔산동으로 이사를 했다. 말년을 보낼 집이다. 십여년 동안 전세를 내주었던 집이라 이것 저것 손 볼 게 많았다. 그동안 정신없이 사느라 불필요한 물건들이 수북이 쌓였다. 수십년을 묵혀둔 것들도 있고 한번도 쓰지 않은 물건들도 있었다. 집사람이 과감히 버렸다. 십여년 이상을 써왔던 세탁기, 냉장고도 버렸고 장롱도 버렸다. 몸집을 줄이고 나니 육신과 영혼이 날아갈듯했다. 특히 베란다에는 화분 몇 개만 놓았을 뿐 빨래 건조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았다.

“여보, 난 채송화가 좋은데.”

며칠 전 아내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얼마 후 채송화 한 분을 사왔다. 내 말을 기억해둔 모양이다. 빨강색과 노란색 그리고 하얀색 세종류였다. 그래도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내 밖에 없다.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 분꽃은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하는, 눈물 글썽이게 하는 고향의 꽃이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 어효선 작사

70년대초 초등학교 선생할 때 풍금을 치며 아이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이다. 붕어 같은 입술로 내 풍금 소리에 맞춰 불렀던, 지금은 다 오십도 훌쩍 넘었을 제자들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새삼 고향 제자들이 생각난다.

누구나 다 한가지이겠지만 나는 어릴 때 꽃밭 가꾸기를 좋아했다. 담벼락을 뒤로 하고 타원형으로 둥글게 돌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거기에 막대를 세우고 새끼줄로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꽃밭에는 채송화,봉숭아,백일홍,나팔꽃,과꽃,코스모스 등을 심었다.

채송화는 작지만 예쁘고도 앙증맞다. 여름 한낮 작렬하는 햇살 아래 피어있는 빨간 채송화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면서 한없이 겸손한 작은 성자 같기도 하고 창밖을 바라보며 깨금발을 딛고 선 앙증맞은 손녀 같기도 하다. 그 옛날 꽃밭에서 보았던, 그 여름 햇살 아래 피었던 그런 채송화를 다시 보고 싶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나 생각은 언제든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아내에게 봉숭아도 얘기했는데 베란다에서 키우기에는 좀 거추장스러웠던 모양이다.

아내는 채송화 분을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놓았다. 이제 조석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늑했던 고향집을 생각하며 잠시라도 순수한 어린애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정화는 별도로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채송화야 나와 인연이 되어주어 고맙구나.”

“내가 널 잘 키워 씨를 받아 지인들에게 고향의 향기를 나누어주마.”

아내가 사온 채송화 분 하나가 내게 은은한 기쁨을 주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행복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 내 누이가 생각난다. 고향집 뒤곁은 야단맞을 때나 힘들었을 때 소리없이 울던 곳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뒷베란다가 그런 공간이 아닐까 싶다. 여기는 채송화가 있는 고향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내가 야단이야 치겠냐만 이제는 거기에서 먼 산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베란다를 아무 생각이 없는 무의 공간으로 만들야겠다. 소확행이 이런 것일 것 같다.

-석야 신웅순의 서재,매월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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