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송우영의 고전산책
  • 송우영 시민기자
  • 승인 2019.07.25 19:10
  • 호수 9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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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 싶은 의지를 이길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공부는 한 사람의 일생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후회하는 몇 중 하나가 어려서 공부를 게을리한 것 이라 한다. 그러하기에 공부를 좀 한다는 선비들은 공부의 초점을 어디에 맞출지를 놓고 늘 고민과 선택을 반복한다. 물론 그 선택에서 책임 또한 본인의 몫이다. 주자는 공부는 닥쳐서 부랴부랴 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갖고 천천히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역에 군자가 공부하려는 마음이 종일토록 굳세고 굳세어서<군자종일건건君子終日乾乾> 저녁까지도 여전히 흔들림 없다면<석척약夕惕若> 위태로울 수는 있지만 무너지진 않는다<려무구厲无咎>”고 했다.

공부는 반복 학습하는 것이 방법이다<반복도야反复道也> 어떤 인생이든지 세 개의 길이 있다. 권력과 돈과 공부다. 이 세 개의 길은 알게 모르게 연결 되어있는데 그 출발점이 공부다. 누구든지 일정량의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돈의 길로 가든가 권력의 길로 가든가 선택을 하게 된다.

공부가 한 사람의 삶을 높이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기도 한다. 인생은 짐승처럼 살기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공부를 마친 다음날 아침에 있을 나의 자화상 곧 고난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몰입을 요하는 독종 공부를 통해서 인생에서 겪어질 모든 고통들을 미리 탕감시켜 놔야 한다. 옛 선비는 공부하는 고통을 일러 바람과 싸워서 이기는 고통이라 했다. 사람이 어찌 형체도 없는 바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으랴. 본래 낙원으로 가는 길은 지옥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말일 것이다. 노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놀다가 거기서 길을 잃고 못 나올까봐 그게 두려운 거다.

공자는 필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37500명의 군대 지휘관을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가 없다. 작심하고 덤비는 사람의 의지는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이다<不可奪志> 보잘 것 없는 필부일지라도 마음먹고 공부로 덤빈다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필부도 의지만 있으면 운명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필부작심극명운匹夫作心克命運>

이는 곧 인간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말이다. 옛 사람은 어려서 공부하지 않음에 대해 논쟁이 많았다. 노숙은 여몽에게 공부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한 이다<불학우죄不學于罪>. 여몽이 발끈해서 따져 묻자 노숙은 말한다<하여대왈何汝對曰>. 공부를 하지 않으면<불학자소이不學者所以>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린해지피통이隣害之彼痛而>. 여기에 충격받은 여몽은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는 것은 삼국지에 나오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에 잘 드러나 있다.

공부하지 않는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유즉개지有則改之>. 공부하지 않는 잘못이 없다 해도 더욱더 더 노력하라<무즉가면無則加勉>. 이 문장은 격몽요결擊蒙要結 3第三章 지신持身장 하단 문장인데 그 앞 문장은 공부하는 자에게 있어 경책이 아닐 수 없다. 마땅히 이것을 벽 위에 써 붙여서<당게제벽상當揭諸壁上> 잠깐 동안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수유불가망야須臾不可忘也>, 매일 자주 스스로 점검하되<빈자점검頻自點檢> 마음을 보존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심불존호心不存乎>, 공부가 진전되지 않음이 있었던가<학불진호學不進乎>, 행실을 힘쓰지 않음이 있었던가를 반성한다<행불력호行不力乎>. 이 말의 원전은 증자에서 비롯된다.

논어 학이편에서 증자는 하루 세 번 반성했다 하는데<증자왈曾子曰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그중 하나가 선생님께 배운 바를 반복해서 공부하지 않았는가<전불습호傳不習乎>’이다. 공부는 놀고 싶은 의지를 이길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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