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정착 사할린 동포들 어떻게 사나
서천 정착 사할린 동포들 어떻게 사나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2.18 00:05
  • 호수 10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5년 이전 출생자만 귀국 가능…가족들과 다시 생이별
사할린 한인들 인정하지 않은 ‘한일협정’ 아직도 '유효'
▲정장길씨
▲정장길씨

지난 2010350여가구 122명의 러시아 동포들이 서천에 안착했다. 이들은 일제시대 사할린으로 강제 노역을 위해 징용됐다가 전후 일본이 제대로 조치하지 않아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 모스크바 등지에서 살아오다 서천 사곡리 주공임대아파트에 정착해 여생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이는 1989년부터 한·일 적십자 간에 사할린거주 한국인지원 공동사업체를 결성해 1945년 이전에 강제 징용된 한인동포 중 고국 땅에서 여생을 보내려는 영주귀국희망자를 대상으로 영주귀국·정착을 주선해 온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들이 꿈에 그리던 조국에서 새 삶을 시작한지 훌쩍 10년 세월이 지났다. 이들이 사는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16일 정장씨를 만났다.

그는 1943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에 경남 거창이 고향인 그의 조부가 사할린 섬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1976년에 부인과 함께 남의 사할린 섬을 빠져나와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까자흐스탄으로 갔다. 우즈베키스탄, 까자흐스탄에는 1937년 스딸린에 의해 연해주 등지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과 그 2세들 30여만명이 살고 있었다.

정장길씨는 까자흐스탄 알마티에서 1938년에 창간한 한글신문인 레닌 기치에서 기자로 일하는 한편 국립 까자흐스탄 대학교 신문방영학과에 입학했다. 10여만의 고려인이 살고 있던 당시 까자흐스탄에서 이 신문은 11000부 정도 발행했으며 소련 정부가 무너진 후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이 신문의 하급기자로 입사한 정장길씨는 상급기자, 공업부장, 선전부장, 국제보도부장, 1부국장까지 역임했다.

“194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만 영주 귀국했습니다. 1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20여명이 작고해 지금은 100명이 조금 못됩니다.”

67세에 귀국한 그도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이들의 한국 생활은 비록 모국의 품에 안겼지만 가족과의 또 다른 생이별이었다. 자녀들을 그대로 러시아에 두고 온 것이었다.

정씨는 3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독일에서 살고 딸이 까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 살고 있다.

그는 1992년 소련 공산당이 무너진 이후 그는 까자흐스탄공화국 부통령을 수행하여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통역을 맡기도 했다.

작년 4월에 영주 귀국자 자녀들 중 한 명을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됐습니다. 그래서 알마티에 있는 딸이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여럿이 있는 사람은 어찌 됩니까
2차대전이 끝난 후 러시아에는 동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었는데 모든 가족이 고국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런데 유독 한국사람들만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살아야 한다. 그의 말대로 해방은 됐지만 광복은 아직 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에 있는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방학이면 한국을 방문해 가족들이 서로 만나기도 했지만 지난해에는 코로나 때문에 일체 오고갈 수 없었다.

이들이 영주 귀국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 적십자의 재정적 지원이 컸다. 그러나 그는 우리 부모 세대들이 그들에게 빼앗긴 것을 생각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 부모 세대들이 열심히 노동을 해서 일본 우체국 예금을 들어 모아두었습니다. 예금한 돈은 본인만이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서 후세들이 대부분 이 돈을 찾을 수 없었고 특히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사할린에서 철수하게 되자 고스란히 뺏기고 말았습니다. 특히 1965년 한일 협정을 체결할 때 사할린에는 조선 사람이 없다는 조항에 양국이 합의를 함으로써 이에 대한 주장을 원천적으로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 뒤로도 5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그는 한인단체를 만들어 역사를 바로세우고 억울한 한인 후세들의 권익을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지만 대부분 한국어가 서툴어 단체 결성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에게 최근 출판된 송은일 작가가 쓴 <나는 홍범도>라는 소설책을 건넸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홍범도는 알마티에서 생을 마쳤다. 정씨는 알마티에 살면서 홍범도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려인 사회에서 영웅이었지만 스탈린의 탄압으로 숨을 죽이고 살았습니다.”

여러 민족이 살아가는 러시아에서 탁월한 민족적 지도자가 나타나면 스탈린 정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안 홍범도는 전혀 활동을 하지 않고 죽어지냈던 것이다.

그의 묘를 한국정부에서 한국으로 이장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곳 동포들이 애써 모금을 해 묘역을 단장했는데 관심도 없던 정부가 갑자기 이장하겠다고 나서서 저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합의가 이루어져 올해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할 것 같습니다.”

대전 현충원에는 만주에서 일본 편에 서서 우리 독립군을 상대로 싸운 친일파들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국에 온들 그들과 함께 영면에 들 수 있을까.

정장길씨가 이루려는 목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만주, 연해주,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들며 조선 독립을 위해 살다간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정리한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이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힘든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는 비록 모국의 품에 안겼지만 이로 인해 이산가족의 슬픔을 겪고 있다.  한국에 온 사할린 동포들 대부분이 이런 아픔을 겪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