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옛제련소 부지 정화 작업은 언제?
사설 / ​​​​​​​옛제련소 부지 정화 작업은 언제?
  • 뉴스서천
  • 승인 2021.04.15 07:49
  • 호수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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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어귀에 자리잡은 장암리는 예로부터 외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서기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들이 이곳에서 상륙작전을 벌였으며, 663년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국제 해전을 벌였다. 이를 백강전투라 부른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말해주듯 장암리에는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로 파고든 만이 해자를 이룬 천연의 요새지인 장암진성이 있다.

군산항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가던 일제는 충청도에서 나는 쌀을 빼내가기 위해 1929년에 장암진성의 성곽을 헐어 금강하류의 북안에 축대를 쌓고 갯벌을 매립, 시가지를 조성하여 장항이라고 이름 붙였다. 1931년에는 천안에서 장항까지 철도를 개통하였다.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결제수단으로 금이 필요했던 일제는 조선의 금광을 개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1936년에는 이곳 장암리에 제련소를 들여앉혔다. 일제는 전망산 아래에 모여 있는 민가 18가구를 강제 이주시키고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를 파고든 만을 매립하여 공장을 들여앉혔으며, 전망산 꼭대기에는 높이 90m의 굴뚝을 세웠다.

일제가 지하자원 수탈을 위해 장암리 주민들을 담장 밖으로 내쫓고 제련소를 세운 이래 주민들은 굴뚝에서 내뿜는 아황산가스와 토양의 중금속 오염에 시달려야 했다. 벼 잎맥 사이에 적갈색의 반점이 무수히 나타나는 피해가 장항읍과 마서면 일원에서 발생하곤 하였다. 피해 범위는 멀리 부여의 방울토마토 농장에까지 이르렀다.

참다못한 농민들이 제련소로 쳐들어가 피해보상과 제한조업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정부가 탈황시설 등 환경기준을 강화하자 마침내 1989년에 용광로를 폐쇄하고 전기로를 이용한 습식제련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제련소를 옆에 낀 주민들의 집단 암발병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75월에 와서였다. 주민건강영향조사와 함께 토양정밀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발암물질인 비소가 기주치의 1700배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제련소는 도망치듯 울산으로 철수했고 환경부는 굴뚝 반경 1.5km 안의 지역을 매입해 오염토양 정화작업을 벌였다.

지난 7일 군청 회의실에서는 토염정화토지를 어떻게 활용할 지에 대한 용역 중간보고회가 열렸다. 국제적인 환경테마 특구로 조성한다는 구상이 발표됐다.

그러나 오염 덩어리인 옛 제련소 부지는 굴뚝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를 그대로 둔 채 환경테마파크가 가능한 일인가? 옛 제련소 부지의 정화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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