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2)홍성군 결성면 포구
■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2)홍성군 결성면 포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6.16 23:04
  • 호수 10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산만 막은 홍성방조제…5개면 바닷가 마을 물때 사라져

최악의 수질 홍성호, 농업용수 사용 불가…“악취” 민원으로 해수유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모산만을 막은 홍성방조제
▲홍성방조제

모산만을 막은 홍성방조제

1991년은 대규모로 갯벌을 파괴하는 간척사업이 시작된 간척사업의 해였다. 남해 고흥반도 득량만 일부를 막은 고흥방조제, 충남 보령시와 홍성군으로 파고든 천수만과 모산만을 막은 보령방조제와 홍성방조제, 그리고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막은 새만금방조제 건설이 이 해에 착공됐다.

홍성방조제와 보령방조제를 쌓는 간척사업을 홍보지구 간척사업이라 한다. 이 두 개의 방조제로 홍성군과 보령시 일대의 8100ha에 안정적인 농업용수를 공급한다는 것이 이 사업의 목표였다.

두 방조제 축조에 총사업비 1586억원을 투입해 1991년에 착공해 2000년에 보령방조제를, 2001년에 홍성방조제를 각각 완공했다.

방조제에 갇힌 바닷가 마을들

▲모산만 지형도
▲모산만 지형도

모산만 입구에 있는 모산도를 경유한 방조제의 총 길이는 1856m이다. 이 방조제로 인해 보령시 천북면과 홍성군의 은하면, 결성면, 서부면의 반농반어의 바닷가 마을에 물때가 사라졌다.

결성면은 조선시대에 결성현이었으며 읍내리에 옛 관아 건물이 남아 있다. 대동여지도에 결성현 치소 동쪽에 동포(東浦)라는 지명이 있으며, 지금도 해창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모산만이 서쪽으로 6km쯤 파고들어 왔다가 다시 3km쯤 더 북상한 것이다. 판소리의 기원을 결성농요에에서 찾는 학자들이 있는데 결성은 옛날에는 바닷가 마을이었던 것이다. 해창까지 배들이 들어와 창고 안의 세미나 지역 특산물을 실어내갔다.

홍성군 결성면 소재지에 살면서 논농사를 지으시는 이상돈(1953년생) 어르신을 해창다리 근처에서 만나서 얘기를 들었다.

- 방조제가 없었을 때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습니까?

= 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들어왔지. 이곳 냇가에 재첩이 굉장히 많았어. 지금은 하나도 없어. 그때 이 주변에 농사를 지을 때 물 대기 힘들었어. 짠물이 나오고 그랬으니께. 저기 해창다리가 있잖아. 거기가 조선시대 때는 곡물 창고가 있었데요. 이 앞에 있는 것은 풍구섬이라고 유명했어. 옛날 지도에도 나오고 그랬어. 결성초등학교 2,3 학년까지 소풍갈 때 이곳으로 오고 그랬어. 농경지 제방 쌓는다고 허물어서 사용하는 바람에 지금은 작아졌지. 저기 건너는 염전자리여. 저기 2층 건물은 염전을 할 때 관리사무소였어. 농사지을 때만 사람이 거기에 오고 그렇지.

▲1960년대 모산만 부근 지도
▲1960년대 모산만 부근 지도

70년대 지도에도 홍성염전과 결성염전의 큰 염전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은 모두 논으로 바뀌었고 그 논 일부는 태양광발전단지로 바뀌었다. 드러난 갯벌 일부를 매립하는 공사가 추진되다 방치된 곳도 보였다.

결성면 성호리에 있는 성호나루와 서부면 수룡포에 있는 수룡포 나루를 통해 개 건너 보령시 천북면과 오갔다. 수룡포나루 빈터는 밭으로 변했다. 그곳에서 농작물을 가꾸고 있는 노부부와 얘기를 나누었다.

여기가 다 굴밭이었어. 굴 따고, 바지락 캐서 아무 걱정없이 살았지. 저 방조제 때문에 이 동네는 다 망했어, 그때가 전두환 때든가 노태우 때든가...”

대부분의 간척지는 천수만에서처럼 방치되어 있고 60, 70년대에 작은 둑을 막아 개간한 논에는 곳곳에 대형축사들이 들어서 있다. 해창다리에서 만난 농부 이상돈씨의 말이 떠올랐다.

저 축사들 때문에 물괴기 한 마리도 못잡아먹어
홍성호는 이미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가 된 것이다.

죽음의 호수 홍성호

▲수룡동 나루터
▲수룡동 나루터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제공한다는 홍성방조제는 완공된지 20년이 지났지만 한번도 그 목적을 이룬 적이 없다. 농업용수로도 사용할 수 없는 6급수 수준이다.

홍성호 방조제 배수갑문을 담당하는 한국농어촌공사 천수만사업단에 따르면 강우량이 많아 수위가 올라가면 수문을 열어 바다로 빼지만 민원에 의해서 바닷물을 호수 안으로 넣기도 한다. 축산폐수 악취로 호수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들어오면 수질이 악화된 호수 내부의 물을 바다로 빼내고 깨끗한 바닷물을 호수 내로 유입시킨다.

바닷물이 호수내로 유입되면 염분 때문에 농업용수로는 사용할 수 없다.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면 호수 수질은 다시 악화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방조제로부터 3km 안쪽에 있는 결성양수펌프장은 사용한 흔적이 없어 보이고 굳게 닫힌 철문은 녹슬어가고 있었다.

▲결성양수장
▲결성양수장
▲방치된 간척지
▲방치된 간척지

===========================================================
주민 인터뷰

* 방조제 안쪽에 위치한 홍성군 서부면 신리 수룡동마을로 찾아가서 이곳에 사시는 양상돈(1944년생) 어르신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수룡동 마을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는 주용기 시민기자
▲수룡동 마을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는 주용기 시민기자

방조제 막기 전에는 부자 마을이었다

- 신리 어촌계의 계원은 몇 명이나 됩니까?
= 어촌계원이 한 100여명 될 거에요. 성호리, 신리 등 다른 마을까지 합해서 그래요.

- 방조제를 막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물어보지 말아요. 이 동네는 망한 동네니께. 폭탄이 있으면 텃쳤으면 좋겠어, 그냥. 이 안에 고기가 얼마나 많았었다고. , (방조제를 막은 일은) 미친 짓이었지. 지금은 모기도 많아져서 문을 열지도 못해. 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안강망이라고 하는 배들이 여기로 들어 왔다 나갔다 했어. 저거(방조제)를 막아 버리니께 나갔다 들어왔다 하지들 못하잖여. 그래서 여기가 빈 마을이 돼버렸어, 빈 마을. 아주 촌 마을, 빈 마을이여. 그래도 어업을 해야지 해서 방조제 바깥으로 나가서 해요.

- 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 방조제 없었을 때 꽃게 많이 잡았어요. 잡아서 (다른 지역의) 항구로 가서 팔고 오고 그랬어요. 여기가 집이니까 며칠간 묵었다가 나가고 그랬지. 고기 잡아가지고 부산, 인천 이런 데로 팔러가고 그랬지. 여기 안에서도 고기가 많았어. 지금은 아예 고기란 것을 생각도 못하고 그래. 물이 바꿔졌은게.
바다의 고기라는 게, 바닷가의 잡초에서 새끼를 까는 모양이야. 이 바닷물이 왔다 갔다 쌔게 해야 뻘이 안 차는데, 천수만을 막고 이것을 막고 오천항 앞을 막고 그러니께 예전처럼 바닷물이 왔다 갔다 안 해. 그래서 바닷물이 썩어. 여기에 진줄이라고 하는 것이 많았는데 그렇게 많이 없어졌어. ‘진줄같은 게 있어야, 고기들이 거기 와서 산란을 하지. 마파람(남풍)이 불면 파도가 막 치잖아, 그러면 오종개가 죽어서 바닷가로 떠 밀려오고 그랬어. ‘찰방이라고도 하고 그래, 물고기여.

- 방조제를 막기 전에 바닷물이 어디까지 올라갔습니까?
= 이 바닷물이 원래 결성() 소재지까지 가고 그랬어. ‘해창다리라고 거기까지 들어갔지.

▲굴 따는 도구 조새
▲굴 따는 도구 조새

- 그러면 방조제를 막기 전에 마을에 사람이 얼마나 살았습니까?
= 이 마을이 서부면에서 제일 일등 마을이라고 했는데 부자 마을이였어. 그 전에는 한 100여 호가 살았었죠. 황해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로 피난을 와 가지고 저 산에가 임시로 사는 땟장집을 짓고 많이 살았어. 저 산에 당제 지내는 곳 주변에 그랬어. 마을 사람들이 죽고 나가고 그러다가, 이것(방조제) 막히고서 (마을이) 끝나 버렸지. 여기에 사람들 많이 왔었어. 구경을 많이 하러 왔었어. 어업이 잘 될 적에. 나도 여기서 태어나서 끝장보고 있는데. (지금은) 고기 잡아먹기도 어려워요. , 농사는 하나도 없어요. (어업)만 했어. 여기는 농토가 별로 없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어업만 했어. 여기 앞에가 바다였을 때부터 어업만 했지.

- 방조제를 막을 때 주민들이 반대를 하셨습니까? 보상은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 정부에서 막아 버리는데 어떻게 반대를 할 수가 없지. 방조제 막을 때 보상을 받았는데 얼마나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나지. 그때만 해도 돈이 귀한 게, 돈 백만 원을 주면서 찬성을 할 래, 안 할래 그랬을 것 아냐. 일시로 돈을 주니까 좋다 이거야. 그런데 (방조제를) 막아 놓으니까, 스톱이라(어업이 안 돼 버려). 수입이 없으니께 (어업을) 않는다고 하다가 다시 배를 만들어 가지고 저 밖으로 나가서 또 하는 거야. 우리들 인생은 다 됐으니까 그렇지만은 말이여. 바깥으로 나가서 (어업을) 해야지, 이 안에서는 고기가 없어.

- 천수만을 막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 천수만을 막고 나서 새조개가 많이 나왔는데 그거는 물이 많이 썩었을 나오는 거야. 뻘이 가장 안 좋아졌을 때 나와. 아주 말단이 됐을 때 나온다는 거야. 지금은 나오지도 않아.

- 방조제 이외에 다른 피해 상황이 있습니까?
= 우리들도 부모가 있어야 (어린 애들이) 많이 나오는데. 주꾸미나 낙지라는 것이 있잖아요. 어미, 애비가 새끼를 낳고, 또 그 새끼가 커서 새끼를 낳아야 되는데. 오천항 앞 남당에 가면 낚시배들이 엄청 많아서 새끼들을 많이 잡아버리는 바람에 씨가 말라 버리는 거야. 그래서 고갈되는 거지.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어떻게 막을 수도 없어.

- 이 그물은 무엇입니까?
= 이게 꽃게 그물이여. 옛날에는 면으로 만들어져 나와서 비쌋지. 그래서 조금씩 가지고 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한 폭 짜리를 100, 200개를 갔다가 (바닷속에) 치는 거야. 이것이 바다에 촘촘히 들어있는 거야. 그러니 고기들이 어디를 다닐 수 있어. 고기가 잡힌다고 하면 이것만 쳐 넣는 거야, . 그러니께 (그물을) 많이 넣어야 많이 잡을 수 있으니께 어쩔 수가 없어.

- 처음부터 어업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어업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 내가 여기서 태어나서 할 것이 없으니께 중국집에서 살았어. 국수 빼는 일을 했어. 내가 국수 잘 빼요. 일을 잘 해도 중국 사람은 1만 원을 주면 나에게는 5000원을 주는 거야. 그래서 다시 마을로 와서 배를 탓어. 처음에는 (음식을 해주는) 하장을 하다가 원장을 했어. 기관장 밑에 남방, 그러다가 기관장을 했었고, 선장까지 했어요. 그 전에는 차가 없어서 고기가 팔로가 없었지. 그래서 고기를 소금에 절였어. 그래가지고 결성장, 갈산장으로 가지고 가서 팔고 그랬어. 다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면서 살았어. 내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들 사남매 키워가지고 다 내보냈어. 인생이 다 갔다고 생각해, 지금은. 소일거리를 할려고 이것(그물 손질)이라도 하려도 하는 거여.

- 예전에 방조제가 없었을 때 아주머니들이 이 안쪽에서 어떤 것을 잡으셨습니까?
= 아주머니들은 이 안에서 굴도 잡고, 바지락도 잡고 그랬어. 바지락이 바글바글 했어. 맛조개도 잡았어. 나무를 잘라다가 넣어놓으면 고기들이 엄청 잡혔어. 방조제 바깥으로도 굴을 따러 갔었는데 지금은 다리도 아파서 못 다녀요. 굴을 따는 조새라는 게 있어.

<주용기 시민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