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6)보령시 웅천읍 완장포
■ 기획취재 / 금강권역 사라진 포구를 찾아서 (6)보령시 웅천읍 완장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1.07.29 17:03
  • 호수 10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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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주산면·웅천읍 주민들의 삶의 터전 웅천천 하구갯벌

부사방조제로 646ha 간척농지 생겨…“지금같았으면 막지 말았어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30년대 웅천천 하류 지역 지도
▲1930년대 웅천천 하류 지역 지도

부여군 외산면 문신리에서 시작해 보령시 미산면의 복잡한 지형의 골짜기를 통과해 서천군 서면과 보령시 웅천읍 사이를 통과해 서해로 빠져나가는 웅천천의 총 길이는 34.3km이다.

1986년 서면 도둔리와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를 연결하는 총길이 3474m의 부사방조제 축조사업이 시작됐다. 서면 부사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방조제 축조의 목적은 웅천천 하류지역의 침수를 막고 우량농지를 조성하는 데 있었다. 만조 때 폭우가 겹치면 웅천읍 시가지가 대부분 물에 잠겼다 한다.

보령시 미산면 웅천천 상류에 자리잡은 보령댐은 부사간척지와 탄생을 같이 하고 있다. 간척사업이 시작된 직후 새로 생기는 646ha의 농지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89년 보령댐 타당성 조사가 시작됏다.

총저수량 11690만톤의 보령댐은 착공 4년 만인 1996년에 완공되어 담수를 시작했다. 부사방조제는 그 이듬해인 1997년에 완공되어 이후 보령댐으로부터 용수를 공급받아 염분을 제거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처럼 부사지구 간척농지와 보령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부사지구 간척농지 뿐만이 아니라 남포간척지에도 부사호에서 취수해 농업용수가 공급되고 있다. 이처럼 보령댐에 의존해 농사를 짓고 있는 농지는 1900ha에 이르고 있다. 또한 서산·당진·홍성·예산·태안 등 5개 시·군에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새우젓배가 드나들던 웅천읍 완장포
▲새우젓배가 드나들던 웅천읍 완장포

부사방조제를 웅천천 하구가 막히기 이전에 웅천읍에 배가 드나들던 포구가 있었다. 옛지도에는 완정포(浣汀浦)’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완장포라 부른다. 웅천읍 대창리에 있다. 완장포에서 부사방조제 배수갑문까지의 거리는 8.6km에 이른다.

부사방조제로 인해 보령시 웅천읍과 주산면, 서천군 서면 북쪽 해안의 바닷가 마을들이 사라졌다. 완장포의 한 민가에는 지금도 포구였을 당시 사용하던 새우젓독이 있었다. 보령시 미산면에서도 20리길을 걸어 완장포까지 와서 새우젓을 사서 지게에 지고 갔으며 뱀장어나 백합을 채취하러 왔다고 한다.

▲대부사리에서 본 부사방조제와 간척지
▲대부사리에서 본 부사방조제와 간척지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서면 원두리, 개야리, 대부사리, 소부사리 등 바닷가 마을 주민들은 지금은 간척지 땅이 된 갯벌에서 그레를 이용해 백합을 채취하면서 살아갔다. 대부사리에서 만난 주민 황인곤씨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부사간척사업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웅천천 하구 갯벌은 웅천읍, 주산면 서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허정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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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인터뷰/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보령시 웅천면 대창리 완장포에 사는 한 주민(1953년생)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웅천읍 대창리 완장포에 사는 주민

주민 인터뷰/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보령시 웅천면 대창리 완장포에 사는 한 주민(1953년생)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웅천읍 대창리 완장포에 사는 주민
▲웅천읍 대창리 완장포에 사는 주민

- 여기 옆이 옛 완장포이던데요. 여기까지 어떤 배가 들어왔습니까?

= 새우젓 배가 들어왔어요. 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 봤어요. 열 살 넘어서까지 봤어요. 젓을 담아 갔고 왔죠. 여기 사람들이 배를 부리고 했어요.

- 당시에 배를 소유했던 분이 살고 계신지 아십니까?

= (웅천)시장 옆 큰 도로가에 있는 방앗간 집이 배 몇 대를 부릿시유(부렸어요). 지금은 아들이 살지유. 그 사람 아버지가 했지유.

- 당시에 배가 몇 척이나 정박해 있었습니까?

= 배가 여러 척() 들어왔어유.

- 그럼 당시에 어떤 물고기를 잡고 그랬습니까?

= 새끼 뱀장어가 엄청 많이 살았어유. 돌 틈새기에 구물구물했시유(아주 많았어요). 그때 돈들 많이 벌었었어요. 지금은 부사방조제를 막아 가지고 없어요.

- 하천 중류에서 큰 뱀장어를 많이 잡았겠는데요?

= 뱀장어가 그렇게 많았았데야. 어른들이 많이 잡고 그랬지.

- 이 항아리가 새우젓을 담던 항아리입니까?

= 옛날에 쓰던 새우젓 항아리인데 지금은 나오지도 안 해요. 옛날에 많이 셨지(사용했지).

- 어르신은 이곳에서 얼마나 사셨습니까?

= 보령시 미산면에서 살다가 2005년도에 이리로(이곳으로) 이사를 왔어요. 내가 어렸을 때 이곳까지 새끼 뱀장어를 잡으러 왔어요. 거기서 여기까지 한 20(8킬로미터)될 게에요. 그때는 차도 없었어요. 다 지고 다녔어요.

주민 인터뷰 / 보령시 웅천읍 노전리

보령시 웅천읍 노전리에 사는 주민(1945년생)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 부사방조제를 막기 전에 이곳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 부사방조제와 보령댐 막기 전에 이곳이 물난리 났어요. 저기서 내려오고 바다에서 들어오는 물이 합쳐져야 물난리가 났는데 지금은 (방조제 때문에) 바닷물이 안 들어오지, (댐 때문에) 안 내려오지 그러니까 물난리 안 나. 그 전에는 이곳 농경지뿐 아니라 시내까지 물이 찾다니까. 83년돈가, 87년돈가 한 두 번 났을 거야.

- 이곳에서 어릴 때부터 사셨습니까?

= 웅천시내에서 신발 장사를 하면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가 한 20년 됐어. 시내 살았어도 다 알지 뭐.

-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무슨 농사를 짓고 계십니까?

= 나 먹을 만큼만 벼농사를 짖고 있어.

- 저기 완장포에는 어떤 배들이 들어왔습니까?

= 우리 어릴 때는 새우젓 배가 거기까지 들어오고 그랬어. 새우젓 배가 들어와 아주 시끄럽고 그랬네, 허허허. 다 지게로 날라야 하고 그러니까.

- 당시에 배가 몇 척이나 됐습니까?

= 배는 한 네 대 정도밖에 안 됐어.

- 당시에 물고기가 얼마나 잡혔습니까?

= 고기 많이 잡혔어. ()장어 새끼도 있잖어, 실뱀장어가 많이 살아서 실뱀장어 잡아다가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

- 당시에 또 무엇을 잡았습니까?

= 비가 오고 그러면 후레시 들고 참게를 잡아다 먹고 그랬어. 참게는 가을에 벼가 노릇노릇 익었을 때 잡는거 거든. 우리도 잡아다가 먹고 그랬어.

- 다른 물고기도 잡혔습니까?

= 다른 물고기는 별로 없고, 낚시질이나 다니고 그랬어. 지금은 옛날보다 못 혀.

- 김 양식도 많이 했습니까?

= 여기 해태, 김이 제일 비쌋어. 방조제 막은 그곳에 김이 재일 비쌋어. 지금은 그곳 동네사람들이 다 이사 가고 없어. ()부대 사격장 때문에 다 이사 가고 없어. 옛날에는 광암동네라고 했어. 지금은 소황리라고 부르지. 지금은 철조망을 쳐서 다 군부대가 됐는디, .

- 조개도 잡으셨습니까?

= 우리 어릴 때 여기에 나가면 백합 조개를 발로 해서 이만큼 잡고 그랬어. 제일 비싼 조개여. 옛날에는 백합, 바지락이 잡혔어. 지금은 안에서 아무것도 못 혀. (방조제) 바깥에서는 아직도 바지락을 잡고 그려.

- 방조제를 통한 해수유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 다시 (방조제가) 터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그려. 농업용수는 보령댐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방조제를 터도 괜찮다고 그러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혀.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면 ()벌이가 좋잖아. 쌀농사를 지어봤자, 남아 돌아가잖아. 그래서 쌀 값도 없어. 여기 동네 사람들은 (방조제가) 다시 터져야 한다고 그려. 바다에서 나오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주민 인터뷰 /서면 대부사리 주민

서면 대부사리에 사는 황인곤(1962년생)씨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서천군 서면 대부사리 마을
▲갯벌에 의존해 살던 서면 대부사리 마을

- 원래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까?

= 마을에서 태어났고 올해 육십()이네요. 그동안 청주에 나갔다가 귀농한지가 한 8년째 되요.

- 부사방조제를 막기 전에는 갯벌이었습니까?

= 옛날에야 여기 주변이 다 갯벌이었어요. 이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지금은 굉장히 좋았을 거에요. 갯벌에다가 저기에는 김제, 부안처럼 백합양식장이 있었어요. 여기가 꽃게 산란처였어요. 방조제 안쪽 말이에요. 예전에 여기 마을 뒤에 날맹이로 넘어가면 갯벌로 가는데 5분도 안 걸렸어요. 저기 올라가서 보면 경관이 굉장히 좋았어요. 차라리 저 (부사)방조제를 없애고 아주 좋아지지 않겠나. 지금은 식량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 쓰잖아요. 쌀이 남아돌아가는 시점에서는 다시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 간척된 땅에서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계십니까?

= 방조제 막고 나서 가구당 3000평씩 농사지으라고 나누어줬어요. 임대료를 내애죠. 일 년에 한 150만 원 정도를 농어촌공사에 낼 거에요. 농토를 분할은 안 하고, 지금까지 임대를 하고 있어요. 여기도 분할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원()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 먹는 것도 못해 버리죠. 왜냐하면 (평당) 5만 원씩 만 잡아도 3000평이면 15000만 원이잖아요. 그러면 농사짓는 노인네들이 그 땅을 살 수가 없는 것이죠. 잘못하면 그 비용()이 대물림되는 거에요. 그러다보니까 주민들에게 분양을 못하는 상태에요.

- 마을 주변에 축산단지가 있던데 어떻습니까?

= 참 아쉬운 게 많아요. 마을 앞에는 축사가 없는데 이 넘어(간척지)에는 완전히 축산단지가 되어 버렸어요. 냄새가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지는데 (축산)업주들이 악덕이에요. 그 사람들이 객지에서 여기 와 가지고 어마 어마한 부를 축적했는데도 가축 분뇨(처리)시설에 대해서 정부에서 지원만 받지 자기네가 이익을 얻은 거를 거기(분뇨처리시설)에다 투자를 안 해요. 사실 춘장대(해수욕장)같은 데도 피해를 아주 많이 봐요. 관광객들이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할 정도로 피해를 많이 보고 있어요.

- 대부사리는 몇 가구나 됩니까?

= 지금 45가구 정도 돼요. 여자분들 혼자 사는 분들도 많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동은 없어요. 왜냐면 헌집이 나오면 무섭게 팔려요. 이런 집도 헌집을 사서 새로 지은 집이거든요. 농사짓는 것은 아니고 은퇴해서 살려고 온 것이죠. 집을 지어놓고 1주일에 한 번씩 오는 분도 있죠. 서면 같은 경우에는 인구가 늘으면(늘어나면) 늘었지, 줄지가 않아요. 여기 서면이 면 단위 치고는 굉장히 부촌이거든요. 여기는 조금 부지런하기만 하면 먹고 살기가 좋아요.

또 같은 대부사리에 사시는 박성도 어르신(1937년생)을 만나 추가로 얘기를 들었다.

- 방조제를 몇 차례 막아서 간척지를 만들었습니까?

= 왜정 때 도로가 있는 데로(곳으로) 제방을 1차로 막았어. 주항저수지가 배다리(저수지). 그 저수지까지 바닷물이 들어가서 배가 갔데요. 지금 방조제 안으로 들어와서 배가 닷데야(다았데야). 그래서 배다리여. 그러고 나서 6.15(한국전쟁) 직후에 (황해도에서 온) 피난민들이 앞에 있는 흙섬에 왔었어. 흙섬이라는 데에 난민촌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살았지. 미국에서 밀가루를 지원해 주니까 그것을 그냥 줄 수가 없어서 그 분들을 노역을 시켰어. 그래서 중간에 또 한 번 더 (방조제를) 막았어. 왜정 때 막은 데 밑으로 또 막은 거여. 그러면서 간척지 논이 많이 생겼지. 북에서 온 김대일 씨라는 분이 공생조합을 만들어서 조합장을 했지, 공생조합장. 그분이 도청을 다니면서 돈 끌어오는 일을 했어. (만들어진) 간척지를 그 분들끼리 분배를 했지. 그러고 나서 그 밑으로 부사방조제 만들었지. 그러니까 세 번째 막은 거야.

- 방조제 막기 전에 갯벌에서 무엇을 잡으셨습니까?

= 맨손어업을 많이 했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면 굴도 잡고(까고), 조개도 잡고, 돌을 깔아서 백합 양식도 해보고, 별거 다 했어. 모래가 참 좋았어. 윤기가 나. ()에서 잡는 조개하고, 모래에서 잡는 조개하고 다르더라고. 그물을 쳐가지고 잡기도 했지. 배로는 안 잡았어. 경운기도 들어갔지. 개야리 앞에서는 작은 조개, 치패가 생겨가지고 그것을 고가로 사가더라고. 종패라고 하는데 치패라고도 하지. 민물하고 바닷물이 섞이는 곳이라 각종 어종들이 많은가 보더라고.

- 방조제를 막은 후에 간척지에서 벼농사를 짓고 계십니까?

= 논 한 배미, 3000평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 분할이 아니고 임대료로 매년 거의 200만 원을 내고 벼농사를 짓고 있어. 거기 외에는 농토가 없으니까 서로 할려고 하지(먼저 임대를 해서 벼농사를 지을려고 하지). 저기 가면 소부사리와 개야리가 있어. 여기 대부사리와 함께 예전에는 해안에 인접해 있었어. 과거에는 이 해안이 보령까지 갔거든. 그래서 이 세 개 마을 사람들에게 한 필지(3000)씩 임대를 주고서 농사를 지어라고 했어. 그런데 작년까지만 해도 벼농사를 짓는데 염해 피해를 많이 봤지.

<주용기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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