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이 비 그치면
■ 모시장터 / 이 비 그치면
  • 권기복 칼럼위원
  • 승인 2021.08.26 11:33
  • 호수 10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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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복 칼럼위원
권기복 칼럼위원

장작불을 지핀 듯이 뜨거운 열기로 숨결을 가로막던 코끝에 갑자기 선선한 바람기가 스며들었다. 아마 올여름은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한 추억을 남길 것 같다. 세계 곳곳에서 섭씨 45°를 넘나들고,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가 섭씨 35°를 넘겼다는 뉴스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낮의 폭염은 여전했지만, 조석에는 너무나 달라진 공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축 늘어졌던 몸이 생기를 되찾아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힐끗 달력을 보니, 처서(處暑)를 지나고 있었다.

처서는 더위를 안정시킨다.’, 즉 더위를 누그러뜨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처서는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드는 절기로,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라고 할 정도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때를 일컫는다. 입추 무렵까지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이때부터 한풀 꺾이면서 제법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처서가 지나면 풀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밭 둑이나 산소의 풀을 깎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라는 속담은 조석으로 선선한 기운 때문에 파리나 모기의 극성도 사라짐을 표현하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냉방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때에는 무더위와 모기로 인하여 여름밤 내내 뒤척거려야 했던 힘든 추억을 간직한 분들도 많다. 그러한 만큼 처서의 시원한 바람결은 청량감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 수많은 고추잠자리가 저공 비행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음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처서 절기를 전후로 연일 비가 내리고 있다. 태풍의 영향과 가을장마 때문이다. 한동안 가뭄이 심했던 탓에 땅을 촉촉하게 적셔줄 만큼의 비는 꼭 필요하다. 그런데 강수의 양과 시간이 지나치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라는 속담은 처서 때 비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다. 이는 처서 무렵이 봄여름 내내 정성 들여 가꾼 오곡백과가 마지막 결실의 때를 맞아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의 기운을 받아 제 빛깔로 익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비가 내리게 되면 곡식과 과일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1년 농사의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 비 그치면, 폭염과 열대야로 인해 잠 못 드는 날은 없을 것이다. 이번에 내린 비로 가마솥처럼 달구어진 땅과 공기가 식어서 무더위를 날려 보내줄 것이다. 물론 9월 초까지의 햇볕은 만만하지 않겠지만, 아침저녁에 만나는 선선한 바람결은 우리에게 생동감을 불어 넣어줄 것이다. 가을에는 비가 그칠 때마다 기온이 내려가지 않았던가. 델타 변이의 창궐로 극성을 부리는 코로나가 소멸하여 마스크까지 벗어 던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가을이 또 있을까.

1년 농사를 코앞에 둔 농민들을 위해서라도 이 비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만큼의 강수만 하여도 그동안 목말라했던 농작물에 충분하고, 김장용 무와 배추, 파 등을 가꾸기 위해서도 부족함이 없다. 오늘까지는 모든 면에서 감사한 비였지만, 더 이상 이어지는 강수는 농부들의 눈물과도 비례할지 모른다. 한동안 낮에는 햇볕이 쨍쨍하고, 조석에는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려 주기를 빌고 또 빈다.

이 비 그치면, 폭염 앞에서 무력함에 빠졌던 나 자신을 추스르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활고를 겪는 이웃과 아프간 난민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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