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청소년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촉법소년들이라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교 폭력은 흔한 일이고, 자동차를 훔쳐 사고를 내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살인과 강간 등 더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청소년들의 범죄에도 응당한 법적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가. 청소년기를 험하게 거친 아이들도 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촉법소년들도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범법자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본질이 나쁜 것은 아닐 테니까.
나는 ‘나쁜 소년은 없다’를 펼치며 작가가 왜 나쁜 소년은 없다고 했을까 궁금해졌다. 나쁜 소년이 없다면 그는 왜 청소년 시절 나쁜 청소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며, 결국 그가 원하지 않는 세상으로 떨어져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자신의 비행을 사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흑인 작가인 월터 마이어스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양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사랑을 받으며 자란 작가는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거기에 흑인이어서 행동에 제약을 받으면 폭력적으로 변한다. 책을 던지고 뛰쳐나가고, 폭력을 쓰며, 결석을 밥 먹듯 한다.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가치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백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들은 직물 지구의 노동자로 사는 것이 정해진 행로이다. 그는 절대로 그 지역으로 흘러들지는 않겠다고 각오한다.
머리가 뛰어난 아이들을 위한 심화반 프로그램에 선발된 작가는 고등학교 1,2 학년을 한 번에 건너뛰고 3학년으로 진급한다. 다른 아이들은 진학에 대한 희망에 차 있으나 그는 대부분의 대학이 흑인을 선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흥미를 잃는다. 학교에도 가지 않는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렇게 싫어하던 직물 지구의 노동자 생활은 물론 그것보다 더한 일을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국어 선생님이 글을 쓰는 것은 포기하지 말라고 한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책도 많이 읽으라고 했던 말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열심히 읽고, 메모하고, 쓴다.
작가가 나쁜 소년은 없다고 한 말을 되새겨본다. 그는 나쁜 소년이었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그를 사랑했고 몇 분의 선생님들은 자신에게 글쓰기와 책 읽기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나쁜 소년이었지만 나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지만, 결코 나쁘게 살지 않으려는 자존감이 그를 수렁에서 건져준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촉법소년이라고 풀려나 가정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가정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소년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방임이 우리 사회를 해하는 범죄의 씨앗으로 방치해 두는 지도 모른다. 그들에 대한 알맞은 법적 처벌을 내리는 한편 그들을 교화하고 길을 열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