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엄마(마지막회)
늙은 엄마(마지막회)
  • 뉴스서천
  • 승인 2002.04.11 00:00
  • 호수 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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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이 끝나 가는 2월이 왔다.
선생님께서 한 학년을 마무리하며 부모님을 모시고 ‘작은 발표회’를 한다고 하셨다.
각 반에서 직접 무대를 만들고 아이들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선다고 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모둠별로 모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이야기 나누었다.
우리 모둠에서는 새인이가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현주가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동요를 할 것인가 인기 가요를 할 것인가를 놓고 얼마간 의견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현주가 잘 하는 인기 가수의 흉내를 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시를 낭송하기로 했다. 선뜻 하겠다는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새인이가 “민지는 시를 잘 쓰니까, 그리고 목소리도 좋으니까 시 낭송을 하는 게 어때?”하고 아이들에게 말해서 너무 기뻤다. 낭송할 시는 내가 정하기로 했다.
방과후에 우리는 학교에 남아서 연습을 하거나 엄마 아빠 모두 출근하셔서 비어있는 친구 집에 가서 연습을 했다. “시 낭송을 할 때 음악을 준비하는 게 어떨까?” 하는 현주의 말에 선생님께 부탁해서 ‘사랑의 인사’ 라는 곡도 준비해두었다.
드디어 ‘작은 발표회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학교는 흥분된 분위기였다. 몇 학년 무슨 반 아이들이 뭘 한다더라. 게네들은 무슨 옷을 함께 입었다더라, 같은 소문에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발표회 시간에는 각자 자리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드르륵” 뒷문이 열리며 경호 엄마가 제일 먼저 들어오셨다. 그 뒤로 현주, 수연이 엄마가 들어오시고 수임이네는 할머니까지 꽃다발을 들고 오셨다. 선생님께서 인사말을 하시는 동안 내 마음은 온통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문에 가 있었다. 윤대의 마술 쇼가 끝나자 우리 모둠 순서가 되었다. 먼저 새인이가 무대에 올라섰다. 멋진 발차기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모 선글라스까지 빌려왔다는 현주의 화려한 무대엔 다들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현주 뒤에 서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춘 남자아이들이 자꾸 실수를 하는 바람에 교실은 한순간 웃음 바다가 되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소란해진 분위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잠시 무대에 오르셨다.
“이번에는 시 낭송 차례입니다. 기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이민지 학생의 시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라∼ 랄라∼ 라라라라라∼”
음악 소리에 맞춰 무대에 오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슬며시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문 옆에 엄마가 서 계셨다. 준영이는 큰집에 맡기고 오셨는지 혼자 서 계셨다. 그런데 엄마의 큰 입술에 빨간 립스틱이 발라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빨간 입술은 엄마의 검은 피부 때문에 더 도드라져 보였다.
“시를 낭송하겠습니다. 늙지 않은 엄마. 이민지. 우리 엄마 이마엔 주름이 많습니다. 구불구불 흐르는 시냇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늙지 않으셨습니다. 내일보다는 늙지 않으셨습니다.”
시 낭송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보다 엄마들 쪽에서 먼저 박수가 나왔다.
문 옆에 비스듬히 서 있던 엄마의 얼굴을 보며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는 엄마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언뜻 엄마의 눈이 빛난 것도 같다.
무대에서 바라보니 엄마의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 낡은 셔츠도 보이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빨간 입술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맑은 눈만이 보였다.
엄마는 참 아름다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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