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14)/ 시정마
■ 박일환의 낱말여행 (14)/ 시정마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2.09.08 10:34
  • 호수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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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받이 수말의 조력자
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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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보면 유명한 장수나 왕이 타고 다녔다는 명마들의 이름이 등장하곤 한다. 중국의 삼국 시대에 관우가 타고 다녔다는 적토마(赤兔馬)가 있는가 하면,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가 타고 다녔다는 여덟 필의 준마를 팔준(八駿)이라고 했는데, 그중 한 마리인 유린청(遊麟靑)이라는 말이 죽자 돌로 만든 관에 넣어 장사지내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몸매가 잘빠지고 빨리 달리는 이런 명마들이 지금도 있을까? 여전히 명마의 맥을 잇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으며, 지금 그런 명마들이 주로 가 있는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경마장이다.

우수한 말이 있으면 누가 봐도 볼품없는 말도 있기 마련이다. 못난 말을 흔히 비루먹은 말이라고 하는데, 돈키호테가 타고 다닌 로시난테 같은 말이 그에 해당하지 않을까? 못난 말이 있으면 불쌍한 말도 있지 않을까? ‘시정마라 불리는 말의 처지가 딱 그렇다. 시정마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으면 이렇게 나온다.

시정마(시정): 교미 때에 암말에게 혈통 좋은 수말이 채이지 않도록 암말의 기분만 떠보는 말

풀이가 불친절하게 되어 있어 의미가 얼른 다가오지 않는다. 암말의 기분만 떠본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건 제대로 된 풀이가 아니다. 암말은 발정기가 되면 성질이 사나워진다. 동물이 교미를 하기 위해서는 수컷이 뒤에서 암컷 등 위로 올라타야 한다. 이런 행위를 승가(乘駕)라고 한다. 수말이 뒤에서 올라타려고 할 때 기분이 안 좋거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암말이 사정없이 뒷발질을 해댄다. 그러다 수말이 다치는 수가 있는데, 만일 종자가 좋은 수말이 그런 수난을 당하면 말 주인으로서는 여간 낭패가 아니다. 품종이 우수한 종모마(種牡馬), 즉 씨수말은 수십억 원에서 비싼 건 수백억 원이나 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종마가 안전하게 교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원하는 말이 시정마다. 다쳐도 그만일 정도로 값어치 없는 잡종 말들에게 시정마 역할이 돌아간다. 더러 작은 조랑말이 시정마로 쓰이기도 한다는데, 체구가 작은 것도 서러운 터에 남의 씨받이 조력자 노릇이나 하려니 얼마나 못마땅하고 괴로울까? 시정마는 발정기에 들어선 암말 뒤에 붙어서 이리저리 애무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때 시정마가 혹시라도 암말에게 사정할까 봐 시정마의 배 아래쪽과 성기가 있는 부분을 앞치마처럼 생긴 천으로 둘러싼다. 처음에는 사납게 굴던 암말이 드디어 얌전하게 수말을 받아들일 정도가 되면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시정마를 끌어낸 다음 대기 중이던 우수한 종마를 투입한다. 한창 몸이 달아오른 시정마가 순순히 물러나올 리 없다. 그러면 몽둥이로 때려가며 끌어낸다고 하니 시정마의 처지가 더욱 가련해진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시정라고 해서 시정에 한자 처리를 하지 않았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면 始精馬, 始情馬, 試精馬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한 걸 볼 수 있다. 국어사전 편찬자는 시정마의 어원을 찾지 못해 한자 표기를 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내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 사람들이 쓰는 한자어에서 왔다. 1931103일 자 동아일보에 試情馬라는 낱말을 사용한 기사가 있다. 이 한자어는 일본의 양마(養馬) 업계에서 쓰는 용어다. 그렇다면 일제 때 일본의 試情馬가 들어와서 쓰이다가 누군가 한자를 바꾸거나 잘못 사용한 걸 다른 이들이 따라 쓰기 시작했을 거라는 추론을 해볼 수 있겠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시정마라는 낱말의 처지도 기구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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