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지 않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조금은 극단적인 표현같으나 위태로울 수는 있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그 어떤 경우 무슨 시대인들 공부를 비껴간 경우는 없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 초두에서 이렇게 술한 바 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인생사세人生斯世> 공부가 아니면<비학문非學問> 올바른 사람이 될 수가 없으니<무이위인無以爲人> 이른바 공부라는 것은<소위학문자所謂學問者> 특별히 이상하거나 별다른 일이 아니다.<역비이상별건물사야亦非異常別件物事也>”
그렇다 공부라는 것은 그거 별것이 아니다. 저몽독법佇懜讀法<우두커니 미련맞게 하는 공부>이라질 않은가. 그냥 마음 꽉 붙들고 책상에 앉아서 읽고<독讀> 쓰고<서書> 외우기<강講>를 반복하면 되는 거다. 맹자가 말했듯이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라는 것도 아니고 순우곤이 말했듯이 삽 한 자루로 태산을 평지로 만들라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공부처럼 좋고 기쁘고 보람된 것도 없을 것이다. 15세 때 공자의 문하에 들어와 공부했다는 공자의 말째 제자 증자曾子의 경우와 주자朱子의 자녀들에서 보듯이 태생이 다소 둔하여 공부가 늦게 이해될 수는 있다. 주자의 벗 여조겸은 11-15세에 이른 주자의 아들들을 가르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천하를 덮는 대학자인데 자녀들은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뛰어넘는 훌륭한 자녀>는 커녕 그러지 못했다는 거다.
공부는 몸을 세우며<학즉립신學則立身> 가문을 일으키며<흥기벌문興起閥門> 백성을 넉넉하게 한다.<민여곡량民餘斛量>며 격려도 해본다마는 주자의 자녀들은 공부에는 그리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고마운 것은 빼어난 똑똑이가 아님에도 우직하게 공부하기를 게을리하거나 놀지도 않고 그렇다고 꾀부림이나 쉼도 없이 죽는 날까지 국가의 녹을 먹는 관직생활을 하는 그 와중에도 했다. 아버지가 쓰신 사서를 주석까지는 글이 모자라 못달 망정 필사는 해봐야겠다 싶어 논어 맹자를 비롯 꾸준히 필사했다 전한다.
이러한 대목들은 필부인 후학으로 하여금 성현의 글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단서와 같은 거다. 성현의 글이어늘 어찌 필부가 감히 주註는 고사하고 토吐를 달겠는가마는 필사하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성현의 말씀을 필사로 공부한 이가 있었으니 후한 때 사람 곽태郭泰가 그다. 곽태郭泰는 가난<가빈家貧>했으나 어려서 부모를 섬기며<소사부모少事父母:혹 이본에는 아버지가 3세 때 돌아가셨다 기록됨> 효자로 소문이 났다<以孝聞> 15세쯤 이르니<당년십오當年十五> 관청에서 그를 아껴 마구간 관리하는 하리로 삼고자 하니<군현욕이위리郡縣欲以爲吏> 그가 정중히 사양하며 말하길 장부가 어찌 마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되겠습니까.<장부하능집편두소재丈夫何能執鞭斗筲哉:그의 모친은 집안이 가난하여 아들이 고을 하리로 일하여 품삯을 받아오기를 원했다 한다> 그러고는 굴백언을 찾아가 춘추를 배웠다.<종굴백언학춘추從屈伯彦學春秋> 이십세에 이르러<지약관至弱冠>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천하에 떨쳤다.<유시명저由是名著> 이상은 후한서後漢書 권卷68 곽태열전郭泰列傳 및 황보밀皇甫謐 고사전高士傳에 나오는 얘기다.
춘추 곡량전春秋 穀梁傳에 따르면 남자는 10세에 이르면 스승을 찾아가 공부에 뜻을 두며 15세가 되면 스스로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고 했다. 여씨동몽훈에말한다.<여씨동몽훈왈呂氏童蒙訓曰> 오늘 한 가지 일을 기억하고<금일기일사今日記一事> 내일 한 가지 일을 기억하여<명일기일사明日記一事> 오래되면 자연히 꿰뚫게 된다.<구즉자연관천久則自然貫穿> 공부를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크게 많이 하게 된다고 한다.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종손 마융馬融(79-166)은 15세에 이르러 지순摯恂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정현鄭玄127-200은 마융을 사사師事했으며, 정현의 제자가 노식盧植과 공손찬公孫瓚이며 노식의 제자가 현덕玄德 유비劉備다. 이때가 유비의 나이 15세 때 일이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이라 했다. 풀어쓰면 나는 열다섯 살 즈음에 공부에 관하여 마음에 뜻을 두었다 쯤으로 이해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