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 공부로 시작되는 책은 논어 뿐이다. 논어는 공자께서 제자들과 도제徒弟(안무요顔無繇 염백우冉伯牛 자로子路 칠조개漆彫開 민자건閔子騫)와 격대隔代 교육을 통해 나눈 대화를 엮은 책으로 공자의 서열 세 번째 제자 자공子貢이 술述한 것으로 전해지는 바이다. 논어양화論語陽貨17-19문장의 기록은 이렇다.
“하루는 공자께서 말씀하신다.<자왈子曰> 나는 앞으로 아무말 도 하지 않으련다.<자욕무언子欲無言> 그러자 자공이 놀라 되묻는다<.자공왈子貢曰>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자여불언子如不言> 소자는 무엇을 기록하란 말입니까.<즉소자하술언則小子何述焉>”
이 문장으로 미루어 보아 공자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자공은 늘 말씀을 받아적었다. 전손사顓孫師 자장子張도 공자님의 말씀을 적어서 외웠다는 기록이 있다. 논어 위령공論語衛靈公15-5문장으로 부분만 초록으로 기록해보면 이렇다.
하루는 자장이 공자께 묻는다. 남자의 행실은 어떠 해야 합니까.<자장문행子張問行> 여기에 대한 공자의 답변을 자장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다가 기록을 해서 날마다 그것을 외워 익히고 또 익히기를 죽는날까지 했다 전한다. 같은 문장 끝부분에 이렇게 명토박는다. 자장은 이를 띠에다가 모두 써 놓았다<자장서제신子張書諸紳> 띠라는 것은 선비들이 허리에 두르는 띠로 선비는 의관을 갖출 때 장구령張九齡의 지적과 같이 관을 쓰고 갓끈인 백승帛繩으로 갓을 고정하고 황죽영篁竹纓이나 오죽영烏竹纓의 갓끈을 더하여 상대방에 대한 예를 다하는데 특히 허리띠의 경우는 대화 중 좋은 경구가 나오면 기록으로 남겨 두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 특히 공자의 말씀을 토씨 하나 안빼고 기록한 이가 또 있는데 금뢰琴牢가 그다. 금뢰는 사마천 사기 중니 제자열전에는 그 기록이 없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편에 금뢰는 위衛나라 사람이며 자字를 자개子開라 기록한다. 논어 자한論語子罕편9-6문장에 금뢰가 스승 공자에 대한 평가 부분이 있다.
금뢰는 말한다.<뢰왈牢曰> 선생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자운子云>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등용되지 못하셨기 때문에<오불시吾不是> 그런 까닭으로 잡다한 기예를 익힐 수 있었다.<고예故藝> 당시 모든 제자들은 공자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말씀이 너무 어려워 네 사람에게 그 말씀에 대한 좀 더 쉽게 풀이해 줄 것을 묻곤 했는데 자공子貢 자장子張 금뢰琴牢 원사原思가 그들이다. 논어 자한편 9-6문장 주자의 집주는 이렇게 기록한다.
“제자들이 공자님의 말씀을 듣고 기록할 때 그 말씀을 제대로 기록 및 올바로 이해를 했는지 아닌지를 금뢰에게 다시 물어 확인했다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공자께서 돌아가시니 자공은 스승의 묘에서 6년을 시묘를 산다. 司馬遷史記孔子世家 卷47 15-16문장의 기록은 이렇다. 공자는 노나라 북쪽 사수가에 묻혔다.<공자장노성북사상孔子葬魯城北泗上> 제자들은 모두 삼년복을 했다.<제자개복삼년弟子皆服三年> 삼년 심상을 마치고<삼년심상필三年心喪畢> 서로 헤어져 가면서<상결이거相訣而去 통곡하기도 하고<즉곡則哭> 각자 다시 애도가 극진했다.<각부진애各復盡哀> 혹 제자는 다시 남기도 했는데<혹부류或復留> 오직 자공만이 무덤가에 려막을 짓고는<유자공려어총상唯子貢廬於冢上> 육년을 지킨다.<범육년凡六年> 그 후에 떠났다.<연후거然後去>”
공자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 중용 맹자 책도 있지만 대학 책은 공자의 제자 증자가 쓴 책이고 중용 책은 먼 세월에 증자의 제자 공자의 손자 자사공께서 쓰신 책이고 맹자 책은 더 먼 세월 자사의 재전 제자 맹자께서 쓰신 책이다. 공자의 논어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 중용 맹자 세권의 책은 모두 조금의 고집을 부려 말한다면 논어의 각주(?)인 셈이다.
논어책에 대한 설명을 긴 세월에 걸쳐 제자와 후학들이 전傳을 가했다는 말로도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는 참으로 중요하다. 또 그 말씀이 오늘날 내게 무슨 의미로 어떻게 다가오는가가 또한 중요하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두 개의 법칙을 기억하라면 첫 번째 법칙 논어를 배워라, 두번째 법칙 첫 번째 법칙을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