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26) / 드므
■ 박일환의 낱말여행 (26) / 드므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2.12.15 10:44
  • 호수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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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용성을 잃어가는 낯선 낱말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나름대로 국어사전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편이라고 생각하는 나도 가끔 무척 생소한 낱말들을 만나곤 한다. 국어사전 안에는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낱말들이 꽤 많다. 예전에 쓰던 말이 점차 효용성을 잃어 가면서 낯선 말이 된 경우도 있고, 지금은 사라지거나 찾아보기 힘든 물건을 나타내는 명칭인 경우도 있다. 가령 낫이나 호미 따위의 자루에 들어박히는 뾰족한 부분을 가리키는 슴베같은 낱말이 그렇다. 그런데 슴베보다도 더 나를 뜨악하게 만들었던 낱말이 있었으니 드므가 주인공이다.

어느 날 우연찮게 드므에 답긴 삽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집을 발견하게 됐다. 개인 시집은 아니고 여러 명이 쓴 시를 한 편씩 모아 엮은 시 모음집이었는데, 특이한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드므? 그런 이름을 가진 물건이 있나? 바로 국어사전을 찾아서 확인했더니 정말로 그런 이름을 가진 물건이 있었다. 시집 안에 드므에 담긴 삽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는 없었고, 다만 정다운 시인이 쓴 드므가 보였다. 다른 시인이 쓴 이라는 제목의 시와 합쳐 시집 이름을 만든 모양이었다. 그냥 드므라고만 하면 낱말 자체가 낯설기도 하거니와 독자에게 별다른 이미지를 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랬을 텐데, 그런 조합이 시인들의 말 부리기 솜씨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제 드므란 게 과연 무얼 뜻하는 말인지 알아볼 차례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드므를 넓적하게 생긴 독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높이가 낮고 넓적하게 생긴 독. 주로 물을 담아 놓는 데 쓴다.’라고 조금 더 자세히 풀이했다. 독이라고 하면 보통 가로보다 세로가 긴 걸 말하는데, 드므는 그와 반대의 형태를 띤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넓적하고 커다란 다라이 같은 모양을 한 독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하지만 이런 풀이로는 드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옛 풍경을 간직한 시골에 가도 드므의 형태를 한 독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특별한 용도를 위해 제작했거나 색다른 의미를 담아 만든 물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가면 드므라는 물건을 만날 수 있을까? 경복궁 근정전 월대의 모서리에 드므가 놓여 있다. 무쇠로 만든 커다란 통인데, 안내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방화수(防火水)를 담는 용기로서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함으로써 화재 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

궁궐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물마다 모퉁이에 드므를 비치했는데, 재질과 모양,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청동이나 돌로 만든 게 있는가 하면 손잡이가 달린 것도 있었다. 창덕궁의 인정전 앞에 있는 청동 드므가 손잡이를 달고 있다. 궁궐에 불이 나면 드므에 담긴 물을 퍼서 끼얹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계속 물을 퍼날라서 채웠다. 경복궁에 있는 드므는 하단에 돌 받침대를 놓아 겨울에 드므에 담긴 물이 얼지 않도록 밑에서 불을 땠다고 한다. 다른 궁궐에 가도 드므를 만날 수 있으며, 화계사와 통도사 같은 일부 사찰에도 드무를 놓아두곤 했다.

드무에 담긴 물은 일차적으로 불을 끄는 용도로 사용했으나 유물의 안내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쁜 기운과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벽사(辟邪)와 주술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화마를 무섭고 흉측한 몰골로 상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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