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택 신광하 유적을 찾아 / 해교잡영 海僑雜詠
■ 진택 신광하 유적을 찾아 / 해교잡영 海僑雜詠
  • 신웅순/중부대 명예교수
  • 승인 2022.12.29 16:07
  • 호수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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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하(1729~1796)는 석북 신광수의 동생으로 서천에서 태어났다. 1751(영조 27)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786년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에 제수되고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형조좌랑·인제현감(麟蹄縣監우승지·공조참의를 거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일생 동안 시문(詩文)을 좋아하여 삼천리 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를 <남유록(南遊錄)>·<사군록(四郡錄)>·<동유록(東遊錄)>·<북유록(北遊錄)>·<백두록(白頭錄)>·<풍악록(楓岳錄)>·<서유록(西遊錄)> 등으로 묶어서 2000여수의 시를 남겼다.
그가 오늘의 장항읍 송림리에서 거주할 때 부근의 풍광을 그린 시문이 전해오는데 석북 선생의 후손 신웅순 칼럼위원이 이를 정리한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장항읍 송림리 당뫼
▲장항읍 송림리 당뫼

1759(영조 38)년 기묘년에 지은 석북시문문초 聞文初에 진택 아우가 방풍을 캐며 살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문초는 진택 신광하의 자이다.송강 우거라는 석북 시도 있다. 송강은 지금의 서천군 마서면 솔리천을 끼고 있는 송림 마을을 말한다. 진택 선생이 거기에서 살았다.

나는 서천이 고향이면서도 송림마을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해교잡영은 진택 선생이 자염과 방풍을 캐며 잠시 더부살이 했던 해변가 마을 이야기이다.

당시 삶의 편린이해교잡영에 남아있다. 진택 선생의 30세 초반 작품이다. 선생은 석북 선생의 둘째 동생으로 목만중·이헌경·정범조 등과 함께 당대 사문장(四文章)으로 불리워졌던 인물이다.

       배마다 뱅어를 싣고 오는데 
       중산포에 해가 저문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돈을 세는데 희비가 엇갈린다

       계산의 소금 굽는 열 두 항아리
       일출에 소금꽃이 하얗겠다
       내일 아침에는 강경에 올라가
       뱃사람 만나 소금시세를 물어봐야겠다

       연도와 죽도 사이에 
       큰 섬이 견도이다
       이 섬 풍습에 귀신을 좋아하여 
       삭망에 물고기를 걸어놓고 축원한다

       만호진에 조수가 이르면
       생선이 많아 비명을 지르며 만석을 먹어치운다
       먹는 소리 사람마다 달라
       제멋대로 소리 내니 불협화음이다.

       서쪽 백사장에 가면
       봄에는 방풍을 뜯을 수 있다
       바다 사람들은 이름을 몰라
       방풍채라 부른다

       조언이 석문을 만들어
       삭망에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막았다
       보리가 익을 때 풍어가 들고
       파도에 따라 어획량이 다르다

       세 곳의 70여호가
       반 이상이 어업과 염전에 종사한다
       물에서 일할 때는 찬밥을 먹고
       남자는 바다에서 여자는 밭에서 일한다

              -출처: https://cafe.daum.net/heartwings

계산은 닭산으로 이것이 으로 로 변해 지금의 당뫼가 되었다고 한다. 진택 선생이 이 마을, 계산에서 살았다. 배마다 뱅어를 싣고 오는데 중산포에는 해가 저문다.

내 어렸을 적만 해도 이 동네 저 동네로 뱅어 장수들이 뱅어를 팔러 다녔다. 뱅어는 연안에서 생활하다 산란기에 강으로 되돌아가 알을 낳는 회유성 어류이다. 치어 때는 강에서 보내고 성어 때는 연안으로 돌아와 산다. 금강둑 막기 전이라 그야말로 금강하류는 뱅어천지였다. 날로 먹기도 하고 무쳐 먹기도 하고 국으로 끓여 먹기도 한다.

계산에는 소금 굽는 열 두 항아리가 있다. 내일 아침에는 강경에 가서 소금시세를 물어봐야겠다. 천일염이 아닌 자염이다. 자염은 가마에 바닷물을 끓여 전통 방식으로 만든 소금을 말한다. 바람과 햇빛으로 수분만 증발시켜 만든 천일염과는 다르다. 자염을 만든 흔적인 잿빛을 띠고 있는 흙이 지금도 드믈게 나마 남아있다.

견도는 지금의 연도와 죽도 사이에 있는 큰 섬 개야도를 말한다. 그 섬에는 삭망에 물고기를 걸어놓고 축원하는 풍습이 있다. 만호진에 조수가 이르면 생선이 많고 서쪽 백사장에 가면 방풍을 뜯을 수 있다. 보리가 익을 때 풍어가 들고 파도에 따라 어획량이 다르다. 송림 마을에는 반 이상이 어업과 염전에 종사하고 남자는 바다에서 여자는 밭에서 일한다. 당시의 상황과 생활상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진택 선생이 당뫼에 있을 때 석북은 두 편의 시문문초 聞文初송강우거松江寓居를 남겼다.

   봄 모래 바탕에 적은 비가 지나가고
   내 아우는 방풍을 캐네
   열흘날 촌 사립 밖에
   천년 바닷가는 휑하니 비었어라
   집이 가난하매 함께 모여 힘을 쓰고
   경영하는 것은 참으로 궁한 데서부터 나온다
   어쩌면 약 팔던 한강백이
   이를 숨기고 살던 일과 비슷하네

     -신석초 역, 석북의문문초 聞文初」

궁하면 통하게 되어있는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랴. 진택 선생은 거기에서 우거해 자염과 방풍을 캐며 생계를 유지했다.

겨울 해는 짧다. 선생이 잠시 살았던 당뫼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옹기종기 집들이 산 아래 모여있다. 우거한 곳이 어딘지 알 길 없지만 당시 선생의 삶이 시에 남아있으니 대강은 짐작이 간다.

서해 바다를 갔다. 아득히 개야도가 보인다. 당뫼 앞으로는 조그만한 서해 지류인 솔리천이 흐르고 있다. 소금배가 드나들기에는 지장이 없을 듯 좁지도 넓지도 않은 하천이다. 자염했던 곳은 솔리천 주변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어디쯤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주변에는 아직도 잿빛 흙의 자염 흔적이 남아있다. 거기에서 자염을 만들어 소금배에 싣고 강경 포구에가 비싼 값으로 자염을 팔았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 문집에 와병 중인 진택이 염려되어 쓴 시 한 편과 만사 한 편이 전하고 있다.
무구는 진택의 생질로 윤두서의 손자 윤규웅이며 자는 무구이다. 무구는 다산 정약용과는 외사촌간이다.

   진택은 문장이 노숙하고
   듬성하게 난 수염이 시원시원하지
   더위와 흙비로 병에 걸리고
   쓸쓸히 떨어져서 외로운 게 한이라네
   여종 늘 불러 약을 다리고
   자주 당나귀 보내 의원 맞는다지
   믿는 데라곤 생질뿐인데
   어찌하여 내 집을 지나쳤는지?

    - 정약용의무구에게(신구순,신담과 그 가계,326)

문장이 노숙하고 수염이 듬성듬성하다든지 더위와 흙비로 병이 나서 약을 다려 먹었다던지 당시의 모습이 눈에 비치는 듯하다. 손이 귀해 믿는 데라곤 생질 뿐인데 어찌하여 내 짐을 무심히 지나쳤는가. 다산이 진택에게 원망의 심사를 내보이고 있다.

갯벌이 아득하다. 바다에서 당뫼까지는 십리도 넘을 듯 싶다. 바닷 바람이 불어온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호구지책을 면했을 진택 선생을 생각해본다. 자염을 위해 바닷물을 끌어왔을, 바닷가에서 방풍을 뜯으며 살았을 선생의 지난했던 삶을 생각해본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은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시와 가난은 같은 운명체인 것인가.

인생의 눈비가 섞어쳤을 삼십 초반이다.

자염했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석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염은 당시의 생활상이며 그 지역의 역사이기도 하다. 바닷가는 텅 비어 있어 천년 같이 멀기만 하다. 진택 선생이 살았지만 석북 신광수 선생이 아우의 집을 다녀갔던 곳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이 진택 선생에게 두어 편의 시를 남겨 놓지 않았는가. 당시의 사문장가로 일세를 풍미했던 시인이다.

역사도 세월이 가면 풍우에 마모가 되는 것인가. 역사를 소중히 가꾸는 것은 후손들이 해야할 몫이다. 뿌리 없는 나는 없다. 내 어렸을 적엔 대한민국이 최빈국이었다. 지금은 세계 10대 강국, 문화 강국이 되었다.

내 마음의 작은 흔적, 표석 하나 여기에 세운다.

길 안내해주시고 해설해 주신 향토사학자 박수환 님과 자료를 제공해주신 구순 종친 형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석야 신웅순의 서재, 여여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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