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29) / 고요
■ 박일환의 낱말여행 (29) / 고요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1.05 11:45
  • 호수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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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도 등급이 있다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고요'라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 줄 안다. 번잡하고 소란스러움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일수록 고요에 대한 갈망이 깊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짬을 내 깊은 산속을 찾아가 고요 속에 침잠하는 시간을 갖는 이들도 있다. 고요가 찾아드는 한밤중이나 새벽 시간에 홀로 깨어 있길 즐기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잠시 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짚어보면 어떨까? 영국의 보퍼트(F. Beaufort)라는 사람이 바람에 계급을 부여했는데, 이 사람이 만든 바람의 계급 단계와 명칭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실바람: 풍력 계급 1의 바람.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초속 0.3~1.5미터이며, 연기의 이동에 의하여 풍향을 알 수 있으나 풍향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어지는 계급 2는 남실바람, 3은 산들바람, 4는 건들바람, 5는 흔들바람, 6은 된바람, 7은 센바람, 8은 큰바람, 9는 큰센바람, 10은 노대바람, 11은 왕바람이다. 마지막 계급에 해당하는 바람의 명칭과 풀이를 보자.

싹쓸바람: 풍력 계급 12의 몹시 강한 바람.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32.7미터 이상이며, 육지에서는 보기 드문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고 바다에서는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킨다.

모두 국어사전에 있는 말들이다. 한자로 된 명칭도 있지만 순우리말 명칭이 쉬우면서도 정겹게 다가온다. 노대바람이라는 말이 낯설 텐데, 우리 국어사전에는 없지만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이 노대를 실으면서 바다에서 바람이 몹시 불고 물결이 크게 이는 현상이라고 풀이해 두었다. 계급이 높을수록 바람의 강도가 세지고, 싹 쓸어버린다는 뜻으로 만든 싹쓸바람에 이르면 낱말만으로도 바람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람이 가장 잔잔할 때는 언제일까? 계급 1에 해당하는 실바람? 다시 국어사전을 들춰 보도록 하자.

고요: 풍력 계급 0, 바람이 없는 상태.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초속 0.0~0.2미터이며 육지에서는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고 바다에서는 수면이 잔잔하다.

고요를 생각하고 있노라니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첫 구절이 떠오른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바람조차 없는 고요의 상태를 이토록 분명하고 강렬하게 표현한 시 구절을 본 적이 없다. 한용운 시인에게 선사(禪師)라는 칭호를 거저 붙여 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인처럼 우리도 수직의 파문을 불러오는 고요의 힘을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아보자. 그러면 들뜬 마음이 고요 속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상태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인지 헤아려 보는 시간을 누려봄직도 하겠다.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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