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36) / 말버둥질
■ 박일환의 낱말여행 (36) / 말버둥질
  • 시인 박일환
  • 승인 2023.03.01 17:36
  • 호수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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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낱말의 바다

책을 읽다 종종 낯선 낱말을 만날 때가 있다. 딴에는 국어사전을 자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는 편인데도 이런 낱말이 다 있을까 싶을 정도니, 낱말의 바다는 무척이나 광활하다. 책이 아니라 국어사전에서 그런 낱말을 만날 때도 있다. 이런 낱말이 과연 쓰임새가 있을까 싶거나 그동안 사용된 용례를 찾기 힘든 낱말일 경우 당황스러움이 찾아들기도 한다. 그런 낱말 중에 ‘말버둥질’이 있다. 처음에는 ‘발버둥질’을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봐도 분명 ‘말버둥질’이 국어사전 표제어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즉시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국어사전 말고는 다른 데서 ‘말버둥질’을 사용한 문장을 찾지 못했다.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말버둥질: 말이 땅에 등을 대고 누워 네발로 버둥거리는 짓.

버둥질은 ‘주저앉거나 누워서 두 다리를 번갈아 내뻗었다 오므렸다 하면서 몸부림을 하는 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달고 별도 표제어로 올라 있으며, 온갖 힘이나 수단을 다하여 애를 쓰는 짓을 비유할 때 쓴다는 풀이도 붙어 있다. ‘버둥질’과 ‘발버둥질’을 동의어로 처리하고 있으나 발버둥질의 쓰임새가 훨씬 많은 편이다.

말도 정말 버둥질을 칠까? 친다면 언제, 왜 그런 행동을 할까? 말이라고 버둥질을 치지 말라는 법은 없겠으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림이 쉬 그려지지 않는다. 말버둥질은 있는데 왜 소버둥질, 개버둥질, 고양이버둥질, 닭버둥질 같은 말은 없을까 싶은 궁금증도 함께 따라온다. 말[馬]의 생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백과사전이나 말의 습성을 다룬 글들을 찾아봤지만 말이 등을 대고 누워서 버둥질치는 행동을 한다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나름대로 추리해 보자면 몸에 달라붙은 기생충 같은 걸 떼내기 위해서 혹은 화살에 맞거나 병에 걸려서 그럴 수는 있겠다 싶기는 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말의 행동은 아닌 게 분명해 보인다.

국어사전 안에도 ‘말버둥질’이라는 말을 사용한 용례나 출처를 밝혀 놓지 않아 이 말을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용례랍시고 ‘말버둥질을 치다’를 제시하긴 했지만 이걸 제대로 된 용례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느 자료에선가 이 말을 사용한 용례가 있으니 국어사전에 가져다 놓긴 했을 거라는 짐작만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말버둥질’이라는 낱말을 보고 내가 생각한 건 말[馬]이 아닌 말[言]이 버둥질을 칠 수는 있겠다는 거였다. 말[言]이 스스로 못 견뎌서 버둥질을 친다면 어떤 상황을 가정할 수 있을까? 말은 비생명체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는 있다. 하지만 말이 마음속 생각과 다르게 제멋대로 나온다는 얘기를 어렵지 않게 듣곤 한다. 한편으론 억지 논리를 내세워 되지도 않는 말을 주워섬기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발화자와 말이 엇박자로 노는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다는 얘기다. 그럴 때 ‘말버둥질’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누가 헛소리를 늘어놓거나 억지를 부릴 때, “하다 하다 안 되니 말버둥질을 치는구만.” 하는 식으로.

말은 부리기 나름이고, 기존의 말에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다른 용법을 적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물론 ‘말버둥질’이라는 말에 대한 나의 이런 제안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 것이며, 가당키나 한 얘긴지 나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다. 이런 나의 제안에 대해 누군가 “국어사전을 많이 들여다보더니 이젠 말버둥질을 치는 단계까지 왔군, 허허!” 하고 웃어준다면 나도 웃음으로 화답할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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