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주기 노희두 열사 추모식
■ 64주기 노희두 열사 추모식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3.04.26 11:04
  • 호수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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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순수하고 고귀한 주권재민의 실천

서천에서 노희두 열사 추모행사 더 크게 열자

그날 당신들 손으로 이룩한 민주는 오늘에 당신들 품 속, 눈망울에 젖어당신네 가슴에 맺힌 자유는 벅찬 외침이 되어 오늘, 당신의 영광을 말하는 종이 울리고
정희성 <4.19혁명 열사 노희두> 중에서

▲4.19혁명 63돌을 맞아 열린 노희두 열사 추모식
▲4.19혁명 63돌을 맞아 열린 노희두 열사 추모식

헌법 전문에 실린 4.19 정신

1960315일 이 땅에서 치러진 부정선거를 본 영국 런던타임즈의 한국 특파원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희망하기보다 쓰레기통에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타전했다.

그러나 그 기자는 4.19 혁명을 보고 나서는 마치 이 나라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815일과 같았다. 스스로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역사적인 지난 한 주일은 외국의 비평가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한국인이 자유정부를 향유할 자격이 가지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런던 타임즈, 427)고 말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몰고 간 한국의 4월 혁명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터키 청년학생과 시민들은 우리의 4월 혁명을 지켜보던 끝에 428일 독재자 멘델레스를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한국 국민들보다 어찌 못하랴그들은 이스탄불 거리에 나타난 계엄군 탱크 앞에 연좌한 채 한국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AP 통신, 428)

또한 4월 혁명은 드골정부를 주저앉힌 프랑스 학생운동과 미국 대륙을 휩쓴 대학생들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등 세계 각국을 휩쓴 학생운동의 서곡이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 부분이다. 대한민국은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시위 대열에 앞장선 서천의 노희두 열사

▲노희두 열사
▲노희두 열사

이러한 4월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우리 고장 출신의 노희두 열사가 있다. 그는 서천초·, 장항농고를 나와 당시 동국대학교 법학과에 재학중이었다.

노희두 열사와 서천초, 서천중 동기이자 당시 동국대 법학과에 함께 재학했던 김기수(서천읍 사곡리)씨는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1960419일 오전 8시께 서울 중구 동국대 운동장. 동국대생들은 전날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이 당한 테러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당시 법학과 3학년이던 김씨는 강당과 강의실, 도서관을 돌며 동국의 학우들이여, 공부가 머릿속에 들어옵니까?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운동장으로 집결합시다라고 외치고 다니며 학생을 끌어모았다.

재학생 4000여명 가운데 1000명 이상이 모이자 선발대 600~700명은 오전 11시께 캠퍼스를 나왔다.

학생들이 을지로입구, 서울시청을 거쳐 국회의사당 주변을 지날 때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러 경무대로 가자고 말했고 학생들은 동국대학교가 적힌 붉은색 바탕의 현수막을 들고 경무대로 방향을 틀었다.

▲4.19 민주묘지 노희두 열사의 묘
▲4.19 민주묘지 노희두 열사의 묘

중앙청 부근에서 경찰과 맞닥뜨린 시위대는 상수도관을 굴리며 저지선을 뚫으려 했고, 무장한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자 노 열사와 동료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데모의 선두에 섰다. 갑자기 경무대 방향에서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했고 총소리에 놀라 스크럼이 흩어지며 학생들이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노 열사는 경무대 쪽으로 달려가 담장을 넘으려다가 총알이 가슴을 관통했고 숨을 거두기 전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산화했다

동료들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하는 과정에서 나온 첫 희생자였다. 당시 노 열사의 나이 22세였다.

너무 아까운 애다. 머리도 좋고 인품도 좋았다

▲2010년 5월 동국대 교정에 세운 노희두 열사 흉상
▲2010년 5월 동국대 교정에 세운 노희두 열사 흉상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노 열사의 작은아버지 고 노옥래(기산면 두남리) 씨는 2008년 뉴스서천과의 인터뷰에서 
너무 아까운 애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 했으며 인품도 좋았다
고 회상한 바 있다.

그는 조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상경해 노 열사의 시신을 찾아왔으며 기산면 두남리에 안장했다. 또한 서천초등학교 교정에 서천초등학교 37회 동창들과 서천중학교 7회 동창들에 의해 노희두 열사 위령비가 세워졌다. 위령비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노희두의 약력

단기 4272(서기 1939) 620일 대전시 대흥동에서 노종래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인 서천초등학교 및 서천중학교 장항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동국대학교 법학과 3학년 재학중이였다. 성질이 명랑하고 활발하며 의협심이 강하고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빠른 성품의 소유자이든 바 민주주의를 국시로 세운 우리나라가 독재의 독아는 날로 심해 민생은 도탄에 빠져 국민의 원성이 높아감을 본 학생들은 온 겨레의 울분을 풀고자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단기 4293419일 드디어 시위행렬로 시작하여 온 시민의 환호 속에 적수공권 경무대 문 앞에서 투쟁타가 제지하는 불의의 총탄은 무참히도 가슴을 뚫었으니 죽음에 임해 민주주의 만세를 남기고 약관 22세로 순사했다.

건립연월일
단기 429361

한편 두남리에 있는 묘는 작은아버지 노옥래씨가 돌봐오다 20083월 말에 서울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로 이장했다.

장한 죽음 있었기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헌화하는 서천초등학교 학생
▲헌화하는 서천초등학교 학생

4.19혁명이 일어난 지 10년 후 서천초등학교에 근무하던 김두언·박동규 동문, 박종학 김종천 조덕연 김기수 동문 등이 위령비 앞에서 술잔 하나 올리는 것으로 시작 노희두 열사에 대한 추모제가 시작됐다. 1975년부터 김기수 등 동국대학교 서천동문회에서 주관해 매년 추모식을 갖고 있다.

4.19혁명 63주기를 맞은 지난 19일 오전 서천초등학교 교정 동쪽에 있는 노희두 열사 위령비 앞에서 노희두열사 6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구창완(서천사랑장학회 이사장) 동국대 동문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모식에는 서천중, 동국대 동문 외에 구슬환 서천경찰서장, 김창환 전 중부경찰서장(대학 동문), 홍남표 전 교육장. 이미선 장학사, 임학재 전 장항농고총동창회장, 장항 농공고 학생대표 2, 서천여중 선생님과 학생대표 2, 서천초등학교 선생님과 1개 학급 22, 서천군청 사회복지실 나정수 팀장 등 모두 40여명이 참석했다.

동국대학교 서천동문회 하창호 회장은 추모사에서 그 때 당신은 피끓는 청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민주주의 만세를 불렀다. 꽃다운 청춘은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3년을 일구어 온 법학도의 꿈도 아낌없이 바쳤다. 정권을 지키고자 발악하는 총탄을 맨가슴으로 막았다... 당신이 있었기에, 당신의 장한 죽음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가 이렇게 뿌리를 내렸다며 노 열사를 추모했다.

노희두 열사의 1년 선배인 김창환 전 중부경찰서장은 “4.19혁명은 부정선거에 맞선 너무나 순수하고 고귀한 주권재민의 실천이었다서천에서도 노희두 열사의 추모 행사를 더욱 크게 열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다.

이어 참석자들 모두 헌화를 하고 행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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