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44) / 슬갑도적(膝甲盜賊)
■ 박일환의 낱말여행 (44) / 슬갑도적(膝甲盜賊)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5.04 10:53
  • 호수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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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글을 제 것처럼
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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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에서 툭하면 불거지는 게 표절 문제다. 얼마 전에 일본 영화 음악의 거장이라 불리던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타계했다. 그에 앞서 유희열이 사카모토의 곡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일이 있었다. 유희열은 곡의 유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평소 존경하던 사카모토의 음악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들어와 있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논란이 지속되자 사카모토는 모든 창작물은 기존 예술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므로 굳이 문제 삼지 않겠다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임으로써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카모토의 말대로 하늘 아래 전혀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긴 하지만, 그동안 문화예술계에서 단순한 영향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인 베끼기 사례가 심심찮게 드러나곤 했다.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신경숙 소설가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에 나오는 구절을 표절했다는 논란이었다. 신경숙은 표절 의혹에 대해 시인하는 대신 자신의 기억조차 믿을 수 없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비껴가는 바람에 대중의 질타를 받았다. 그 후 표절 문장으로 지목된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를 비꼬아 표절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라는 식의 패러디가 유행하기도 했다.

국어사전에 표절과 관련한 낱말이 나온다.

슬갑도적(膝甲盜賊):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하는 사람.

슬갑을 훔친 도적이라는 말인데, 슬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듯하다. 그러니 저 낱말이 왜 남의 글을 베낀 사람을 뜻하게 됐는지 알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니 다시 슬갑의 뜻을 찾아볼 도리밖에 없다.

슬갑(膝甲): 추위를 막기 위하여 바지 위에다 무릎까지 내려오게 껴입는 옷. 앞쪽에 끈을 달아 허리띠에 걸쳐 맨다.

일종의 무릎 가리개에 해당하는 의복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이렇게 해서 슬갑의 뜻을 알긴 했지만 슬갑도적을 표절과 연결시켜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필시 얽힌 이야기가 있을 듯해서 다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국어학자 이기문이 지은 속담사전슬갑도둑이라는 항목이 있고, 거기서 조선 시대 학자 이수광이 편찬한 백과사전 격의 책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옛날에 한 도둑이 있었는데 남의 집에 들어가 슬갑을 훔쳐서 나왔다. 하지만 이 도둑은 슬갑을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 줄 몰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이마 위에 걸치고 바깥나들이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이런 일화와 함께 그 뒤로 남의 글을 훔쳐서 잘못 사용하는 사람을 일러 슬갑적(膝甲賊)’이라고 했다설명을 덧붙였다.

그 뒤에 홍만종이 펴낸 순오지(旬五志)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홍만종의 글은 이수광이 기록한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서 인용한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같은 뜻을 지닌 말로 문필도적(文筆盜賊)이라는 낱말도 표제어로 올려 두었다.

슬갑을 잘못 쓰고 나간 도둑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남의 글을 베껴서 자기 글인 양 둔갑시킨 사람은 비웃음을 넘어 비난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저작권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표절을 경계하는 자기 윤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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