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북 신광수-번암 채제공-표암 강세황의 우정이 담긴 국보급 유묵
석북 신광수-번암 채제공-표암 강세황의 우정이 담긴 국보급 유묵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23.06.01 10:02
  • 호수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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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 신광수의 「관서악부」 유묵 이야기

관산융마로 유명한 우리 고장 출신의 석북 신광수가 남긴 관서악부는 영조 때 평양감사에 부임한 번암 채제공에게 선정을 베풀라며 증정한 108수의 한시이다. 당대의 명필 강세황이 이를 유묵으로 남겨 전한다. 석북의 후손인 석야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가 관서악부에 얽인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보내왔다. 이 글에서 시조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 「관서악부」 첫머리. 관서악부의 뒷부분에는「관서악부」의 첫 누락 부분을 보서했다는 것과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 「관서악부」를 보며 저간의 감상을 기록한 이가원 박사의 첨서가 있다.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 「관서악부」 첫머리. 관서악부의 뒷부분에는「관서악부」의 첫 누락 부분을 보서했다는 것과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 「관서악부」를 보며 저간의 감상을 기록한 이가원 박사의 첨서가 있다.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1712-1775)는 조선 영조 때 세상에 시명을 떨졌던 인물이다.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암헌공 장의 11세 손이고 부제학을 지낸 어성공 담의 5세손이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 정약용의 외증조인 화가, 윤두서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사십 가까이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말단 벼슬을 전전하다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기로과에 장원 급제했다. 곧바로 승지에 임명, 출사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석북에게 축시 부탁한 번암 채제공

석북은 인생 역정에 굴곡이 많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인구에 회자되는 많은 명시들을 남겼다. 특히 한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한 과시 관산융마는 과시 개혁의 선두 주자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보의 등악양루작품을 주제로 한 우국충정과 애국연민을 노래한 작품으로 원제는 등악양루탄관산융마이다. 당시 평양 교방 기생들이 이 시를 읊지 못하면 일류 소리를 듣지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연예계 스타였다. 당대에도 유명했을 뿐만이 아니라 조선 팔도를 통틀어 오늘날까지도 불리워지고 있는 국내 유일의 문화재급 시창이기도 하다.

석북은 과시뿐만이 아닌 악부로도 그 명성을 떨쳤다. 177463세의 작품 석북집10관서악부이다.

번암 채제공은 석북과 젊었을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번암이 평양 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번암은 당대 최고의 시인인 석북에게 도임 축시를 부탁했다.

석북이 49세 되는 해 1760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가정의 극심한 경제난 해결을 위해 관서지방에 간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관서록을 썼는데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관서의 실경들을 멋진 시로 실감나게 표현해보고 싶었다. 생각만으로 가슴 속에 쌓아두었다가 13년이나 지난 177463세에 이르러 비로소 번암의 전별시를 통해 쏟아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관서악부이다.

칠언 절구 108수로 3024자나 되는 장편이다. 표현 수법이 진주같이 섬세하고 절절하다 하여 '백팔진주(百八眞珠)'라 부르기도 하고, 일 년 사시로 나누어 읊었다 하여 '관서백사시행락사(關西伯四時行樂詞)'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백 팔 수의 칠언절구 악부시라 하여 백팔악부(百八樂府)’라 부르기도 한다.

목민관으로서 선정 베풀라

남인은 인조반정 후 당쟁에서 패배, 숙종 6년 경신대출척 이후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당시 평양감사는 재상의 지위라서 남인이 차지하기란 매우 드믄 일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석북은 번암에게 각별히 관서악부로 우정어린 부탁을 했다.

영웅호걸이나 부귀자들도 미색에 미혹하지 않는 이가 별로 없음을 상기시키고 아난과 같은 도인도 미색에 빠지는 결과가 되어 세존이 청정대법(淸淨大法)으로 고해에서 구하게 되었다는 점을 들어 관서백팔악부가 세존의 청정대법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목민관의 본분과 도리를 지켜 선정을 베풀라는 의미였다. 채제공이 이 악부를 선가수주(禪家數珠)로 삼아 술자리에서 한 번 노래하고 한 번 춤출 때마다 생각하고 자성하도록 당부했다.

관서악부는 채제공이 평양감사로 부임한 후 한 해 동안의 행적을 다룬 것인데 공간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청천강과 압록강 일대이며 시간은 춘하추동 계절의 순환을 밟고 있다. 관서의 지방색을 잘 형상화한, 한국적인 정조가 잘 표현된 악부시이다.

여름의 평양의 예찬을 노래한 제 1 곡을 시작으로 도임 의례, 역사 인물 회고, 관직 생활, 단오절 풍속, 기방 세태, 누대, 선상, 평양 고적, 명승지 유람 등으로 이어지고 가을에는 감사의 문무 행사, 아병 점검, 겨울에는 겨울철의 풍속과 정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봄에는 대동강변의 유흥, 감사의 청렴과 귀장을 노래한 108곡을 마지막으로 끝내고 있다.

강세황의 붓을 빌린 관서악부

이 시를 완성한 후 석북은 또 다른 친구이자 서화로 이름을 떨친 표암 강세황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띄웠다.

이것은 관서백 채백규에게 부칠 백팔악부입니다. 낙랑 강산이 진실로 금릉과 전 당에 뒤지지 않으나 제 시는 당송재자에게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표암의 필법은 일세에 신묘하니, 진실로 그대의 손 끝을 한번 얻어 나의 시를 꾸민다면, 시골 여자가 서시의 손을 빌려 납에다 분을 바르는 것과 같아, 부끄러움을 가리기에 충분할 것입니 다. 장차 낙랑의 강산이 휘영생색하게 함은 백팔서문 중의 말과 같을 것입니다. 표암은 어떻게 생각합니까”(신광수,여표암강세황,문집13 15)

석북은 그대의 멋진 글씨로 이 시를 써 준다면 촌 여자가 서시와 같은 미인이 되지 않겠냐고 했다. 표암은 그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가 1775년 초였다. 석북은 애석하게도 그해 4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표암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가 그해 9월에야 석북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며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그리고는 석북의 아들에게 이 관서악부를 보냈다. 다음은 관서악부의 끝 표암의 발문이다.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 「관서악부」 발문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 「관서악부」 발문

내 친구 신석북이 이 관서악부 108수를 보이며 나에게 글씨를 써 달라 한다. 내가 쓴다고 허락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석북이 갑자기 세상 을 떠났다. 지금 내가 다시 쓰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떨어져 종이를 적셔 누차 붓을 놓았다. 이제 다 쓰고 나서 멀리 있는 그 아들에게 부친다. 석북이여, 내가 식언을 하지 않았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슬프고 슬프구나.”

학계에서는 석북이 지은 관서악부를 표암이 써서 번암에게 전해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석북 후손이 가지고 있는 표암 글씨의 관서악부 발문을 보면 저간의 사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 대해 이덕무는 청비록에서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영월 신광수의 호는 석북이다. 젊었을 때는 시가로 과거를 보는 곳에 이름이 났다. 일찍이 관서죽지사(關西竹枝詞)18수를 지었는데, 화려하고 폭넓은 기상을 다하 였다.
申寧越光洙(신영월광수) 號石北(호석북) 少以詩歌(소이시가) 擅名場屋(천명장옥) 甞 作關西竹枝詞一百八首(상작관서죽지사일백팔수)極其繁華駘宕之狀(극기번화태탕지상)).”

시조명칭 처음 등장한 제15

관서악부의 제 15수를 소개한다. 신임 감사는 제일 먼저 사무를 보는 정당인 선화당에 올라 관속들의 부임인사와 기생들의 축하연을 받게된다. 관서악부10번째부터 16번째까지의 작품들은 감사의 도임에 따른 의전과 축하연을 엄숙하고도 희화적으로 그려낸 시들이다.

축하연 때 행수기생은 감사에게 천침할 기생을 조심스럽게 선발한다. 이 선발이 끝나면 신임감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장한가가 불리워진다. 여기에 이세춘이라는 가객이 창을 부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바로 관서악부15수이다.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관서악부」의 ‘시조 명칭’ 부분
▲표암 강세황이 쓴 석북의 「관서악부」의 ‘시조 명칭’ 부분

初唱聞皆說太眞
至今如恨馬嵬塵

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처음 부른 창은 양귀비(태진은 법명)를 노래한 장한가(백거이가 당 현종과 양귀비 의 사랑을 노래한 서사시)
지금도 마외역(안록산난으로 양귀비가 자결한 곳)에 남은 한을 슬퍼하네
일반 시조에다 장단 가락을 붙인 이는
비로 장안에서 온 이세춘이 아니런가

당대 평양의 가객들은 공연을 펼칠 때마다 양귀비(태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선창했다. 이 비련의 슬픈 가락이 평양감사의 부임 축하연에 불리워진 이유는 감수성이 예민한 관서인들의 기호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세춘이 이 양귀비 노래를 평양에 소개하면서 서울에서 유행중이던 새로운 장단 가락을 붙인 새로운 스타일인 일반 시조를 함께 소개했다.

이 시에서 석북은 가곡류의 창사를 처음으로 시조라는 새 곡조로 지어 부른 인물이 이세춘임을 밝히고 있고 그로부터 시조의 명칭이 비롯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세춘은 이 새로운 장단으로 평양 시민들을 열광시켰을 것이다.

2014년 충남 서천군 화양면 대등리 석북 신광수 묘역에 한국시조협회에 의해 시조명칭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관서악부는 다산의 하피첩이나 추사의 세한도에 버금가는, 당대 최고의 시인 석북과 당대 최고의 정치가인 번암,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표암의 우정이 함께 묻어있는 국보급의 명품 유묵이다.

도움을 주신 신구순 종친 형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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