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48) /시대폐색(時代閉塞)
■ 박일환의 낱말여행 (48) /시대폐색(時代閉塞)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6.08 04:48
  • 호수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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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인이 본 천황제 사회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지방의 작은 도서관에 강연을 갔을 때 청중 한 명이 내게 지금이 어떤 시대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한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기준이 없는 시대인 것 같다고 답변했다.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주장만 내세울 뿐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나 기준이 사라진 시대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그런 경향은 있기 마련이지만 요 몇 년 사이에 그런 흐름이 부쩍 강해졌다는 게 내 판단이다.

자기가 속한 사회나 시대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그렇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 냉소와 환멸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가는 걸 차단할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시대폐색(時代閉塞): 어떤 시대의 사회가 이상이나 목적 따위를 상실하여 혼동되어 있는 상태.

표준국어대사전에만 나오는 낱말이다. 폐색(閉塞)은 닫혀서 막혔다는 말이니, 얼마나 사회가 답답했으면 저런 말이 생겼을까 싶다. 그런데 이건 우리가 만들어 쓰던 말이 아니다. 그런 만큼 사용된 용례도 찾기 힘든데, 어떻게 해서 우리 국어사전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모를 일이다. 궁금해서 출처를 찾아보다 일본의 시인 겸 문학평론가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9108월에 時代閉塞現狀(시대폐색의 현상)이라는 평론을 썼다는 걸 알게 됐다.

이시카와가 이 글에서 자신의 조국인 일본과 폭압을 행사하는 국가 권력을 분리해야 하며,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로서는 꽤 급진적인 생각이었는데, 그건 다쿠보쿠가 그 무렵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관련 서적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집필을 부추긴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해 3월에 간노 스가를 비롯한 4명이 천황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었다.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가는 걸 막고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황제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대역사건으로 규정한 경찰은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회주의자들까지 마구잡이 검거에 나섰다. 이런 상황을 다쿠보쿠는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으로 파악했고, 그런 견해에 토대를 두고 쓴 게 위의 평론이었다.

바로 전 해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직후에 다쿠보쿠는 신문에 자신이 존경하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추도문을 썼는데, 그 글에서도 안중근을 비난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조선인의 애처로움을 알기 때문에 미워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다쿠보쿠는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중에는 한일병합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단카[短歌]가 있어 눈길을 끈다.

지도 위에 놓인 조선국 위에
새카맣게 먹을 칠하며

가을바람 소리 듣네

한일병합 당시에 조선인의 입장에서 시를 쓴 일본 시인은 거의 없었다. 백석 시인이 다쿠보쿠의 시를 좋아해서 그의 성()에 있는 석()을 가져와 필명으로 삼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다쿠보쿠는 1912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시대폐색(時代閉塞)이라는 낱말 덕분에 다쿠보쿠를 알게 됐으니 표준국어대사전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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