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출관老子出關의 경구가 있다. 여기서 노자老子는 춘추시대에 대도무위大道無爲를 설파한 철인으로 도가道家의 종주이자 비조이며 반인반선의 전설을 가진 인물로 태어날 때 엄마 뱃속에서 82년을 살다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그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곡인리曲仁里 출신으로 이름이 오얏나무李 아래서 귀耳가 먼저 나왔다 하여 이이李耳라 하며 자字는 백양白陽이고, 시호諡號는 담聃으로 후학은 이를 노담老聃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자님께서는 일생에 두 번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하는데 첫번째는 마을 장례에 관한 것으로 장례 중에 개기일식이 있어 백주 대낮임에도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져 상여 맨 자들이 가다가 도중에 멈춰 선 일이 있었으며, 이 일 후로 하늘이 어두워지면 시신을 메고 가는 일이 없어졌다 한다.
출관出關이라 함은 당시 노자는 황실 도서관장 곧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 사관史官이었으며 요즘으로 말하면 장관 직위에 해당되는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쯤 되는 직위의 수장으로 망해가는 주周나라를 떠나 신선이 되기 위해 심산유곡을 찾아가던 중 허난성 영보 현에 있는 주 경계선 함곡관函谷關을 넘던 중에 문직門直으로 근무하는 수문장 관윤희關尹喜는 그가 천하제일 지식인 노자임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좋은 덕담을 해줘야 통과시켜주겠다 하니, 노자는 그 자리에서 글자 수라야 5천여자, 장수로는 81장으로 두 권의 덕담을 적은 글을 건네주었다. 37장의 도경과 44장의 덕경이 그것이다. 이를 후대에 이르러 도덕경이라 불렀다.
양웅揚雄의 촉왕본기蜀王本紀에 따르면 노자가 함곡관 수문장 관윤희를 위해 도덕경을 지었다<노자위관윤희저도덕경老子爲關尹喜著道德經>라고 기록한다. 이때가 노자 나이 대략 80이 조금 넘은 나이라 전한다.
노자 도덕경에 대한 최초 주석가는 한비자이다.<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 58쪽 최재목 역주> 81장 체제본으로 완성된 것은 후대에 와서 위魏나라 사람 하안何晏과 혜강嵇康을 오가며 글을 배운 왕필王弼이 16세 때 주석을 달아 분장分章이 시작됐고 이것이 저 유명한 왕필의 주 노자 도덕경이다. 또 하상공본河上公本 노자 도덕경이 있는데 하상공장구河上公章句라고도 한다.<황보밀皇甫謐 고사전高士傳 63쪽 김장환 역>
사마천사기 악의열전樂毅列傳에 따르면 하상공의 제자 계보가 있는데 하상공河上公-안기생安期生-모흡공毛翕公-악하공樂睱公-악신공樂愼公-개공蓋公으로 이어진다. 개공蓋公은 제나라의 고밀高密과 교서膠西를 가르쳤고 또 조참曺參을 가르쳤는데 조참은 한나라 초기 소하蕭何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된 인물이다. 곧 하상공의 문도에서 한漢나라의 재상이 나왔다는 말인데 암튼 하상河上 곧 황하강 하천 상류에 은둔하며 사는 은자가 노자의 도덕경을 구해다가 분장分章 된 도덕경을 분절分節을 가했다 하여 분장본으로는 왕필의 주를 꼽고 분절본으로는 하상공본을 꼽는데 이른바 노자 도덕경의 원형인 셈이다.
그러므로 지금 노자 도덕경을 읽는다 할 때 왕필의 주 노자도덕경본으로 읽느냐 아니면 하상공본 노자 도덕경본으로 읽느냐 로 구분한다.<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도덕경 60-61쪽 최재목 역주>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노자가 도덕경을 쓸 때 나이가 장장 80세가 조금 넘은 나이라는 데 있다. 남자 나이 80세쯤 되면 공부의 깊이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느냐를 되묻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노자는 아무런 참고 도서 한 권 없이 온전히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된 지식만으로 노자도덕경을 그것도 도망가는 황망한 중에 단숨에 썼다는 사실이다. 80세가 넘은 나이에 체력관리가 상당히 잘 되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옛사람 중에 팽조彭祖는 요堯임금 때 등용되어 하夏나라부터 은殷나라 말까지 얼추 8백여 년을 넘게 살고 죽었다 전하는데 죽은 이유가 가끔 침을 뱉어서 기가 빠져서 죽었다. 한다. 또 기독교 성서 창세기에는 무두셀라 라는 인물은 969세를 살다가 죽었다 전하는데 그나 팽조는 무슨 책을 썼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공자님은 73세에 돌아가셨는데 춘추 책을 남기셨고 맹자께서는 83세에 돌아가셨는데 맹자 책을 남기신 바 있다. 공부의 끝이 어쩌면 책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