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의 공부는 삶의 방향을 가늠짓는 테스트 마켓 같은 거다. 어린 아들이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가 책상에 앉아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밥만 먹으면, 눈만뜨면, 공부를 해 댄다면 아마도 대견하고 훌륭한 일이 분명하다. 이는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행위를 향한 시도인 것이다.
이러한 공부에는 전날의 공부와 오늘날의 공부가 존재한다. 전날의 공부는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이나 철학적 통찰洞察을 통한 통섭統攝의 공부라면 오늘의 공부는 앎에 대한 공부로, 곧 지식과 정보를 우선으로 한다. 여기에는 ‘깨우침’은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정보습득에서 오는 기술의 이해나 숙련이 남보다 먼저, 빨리 그리고 많이 알아야 하는 속도전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 대한 제어장치로 ‘속도보다 방향이다’라는 정도의 경구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공부의 결과는 자칫 각각 제자리를 찾는다는 각득기소各得其所를 놓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논어 자한편9-14문장은 이렇게 명토박는다.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오자위반노吾自衛反魯> 후에<연후然後> 음악이 바로잡혀<악정樂正> 고대 시가를 모아놓은 시경의 아악과 송악이 각각 제자리를 잡았다<아송각득기소雅頌各得其所>”
일찍이 공자님께서는 노나라 법의 수장인 대사구를 끝으로 노나라 정계에서 물러나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찾아간다. 이른바 철환주유轍環周遊의 시작인 것이다. 이때가 노나라 정공 13년 기원전 497년 공자님 55세 때의 일이다. 그렇게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신 지가 장장 14년으로 공자님의 천하주유는 고난의 연속이셨다.
63세 때인 기원전 489년 애공 6년에는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국경에 갇혀 진채지액陳蔡之厄을 겪기도 하셨고 이런 일을 겪으시고 노나라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가 애공 11년 기원전 484년 겨울, 공자님 68세 때이다.
시경詩經은 크게 풍風,아雅,송頌으로 구분하는데 풍風은 백성들의 노래이며, 아雅는 국가 잔치와 연회에서 부르는 노래이며, 송頌은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노래이다. 당시에 시경의 노래들은 대략 3천 항목을 웃도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를 얼추 300여편으로 정리를 하셨는 바 후학은 이를 공자님께서 깎아 정리하셨다 하여 ‘산시刪詩’라고 말한다.
논어위정편 2-2문장에 있는 ‘시삼백詩三百 일언이폐지왈一言以蔽之曰 사무사思無邪<시경 삼백 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 의 원형인 셈이다. 본래 각득기소各得其所라는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말로 서합괘噬嗑卦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바 한낮에 시장을 만들어<일중위시日中爲市> 천하의 백성들을 이르게 하고<치천하지민致天下之民> 천하의 돈들을 모아서<취천하지화聚天下之貨> 서로 바꾸어 돌아가게 하므로<교역이퇴交易而退> 각각 제 할 일을 하게 하였다.<각득기소各得其所>
한비자韓非子 제8편 양권편揚權1篇은 이렇게 주석하기도 한다. 닭으로는 새벽을 알리게 하고<사계사야使鷄司夜> 고양이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하며<영리집서令狸執鼠> 저마다의 그 능력대로 사용한다면<개용기능皆用其能> 윗사람은 마침내 일이 없어 편안해진다.<상내무사上乃無事> 여기서 공부하는 후학이 눈여겨볼 대목은 ‘상내무사上乃無事’다. 고래로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만 존재한다. 나를 일으켜 남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다.
일찍이 공자님께서는 공부하는 사람을 네 등급으로 구분하신다. 날 때부터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첫째요,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요, 어렵게 살면서도 공부하는 사람이 또 그다음이요, 어렵게 살지만 그럼에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하등의 사람이라 했다. 그렇다면 공부는 언제가 가장 좋을까, 춘추고春秋考를 쓴 북송때 학자 섭몽득葉夢得의 말을 빌면 천지분간 못할 나이인 어릴 때가 그 으뜸이고, 이때를 놓치면 스무 살이 그 다음이라 했다. 곧 공부는 어릴수록 많이 해둬야 좋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어려서의 공부는 하늘의 복이라 했다. 북송 황제 진종의 권학문은 말한다. 아들로 태어나 뜻을 이루려거든 창문 아래 책을 펴놓고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