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 4·19 혁명 열사 노희두
■ 책 소개 / 4·19 혁명 열사 노희두
  • 허정균 기자
  • 승인 2024.04.17 11:28
  • 호수 119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월 19일 동국대 시위대는 해일처럼 움직였다

그 선두에 스물 두 살 법학도 노희두가 있었다”
▲책 표지
▲책 표지

노희두 열사는 1939년 서천에서 출생 서천초, 서천중, 장항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0419, 3.15부정선거와 이승만 독재정권을 규탄하며 3만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당시 법학과 3학년이었던 노희두 역시 동국대 시위대 2000여명과 함께 효자동을 거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경무대로 향했다.

오후 130분경,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경찰의 총알이 동국대 시위대 선두에 서 있던 노희두의 가슴을 관통하며 노희두는 4.19혁명 경무대 앞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숙부 고 노옥래씨가 상경하여 열사의 시신을 찾아와 기산면 두남리에 안장하고 돌봐오다 20083월 말경 국립4.19민주묘지’ 1묘역으로 이장했다. 두남리에 있었던 묘지의 묘비명에는 殉國學生盧시몬熙斗之墓’(순국학생노시몬희두지묘)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원로시인 정희성(시집 저문강에 삽을 씻고’)4.19혁명 당시 국문과 2학년이었다. 그는 2020년 동국대학교 출판문화원의 의뢰를 받고 노희두 열사의 일대기를 집필하기 시작해 2022년 마침내 책이 출판되었다.(동국대학교 출판문화원)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노희두 열사의 가장 빛나고 처절한 생애의 절정인 19604월의 보름 동안을 주목했다.

2장에는 노희두 열사와 함께 혁명의 현장에서 깃발을 들고 투쟁을 함께 한 동국대학교 57인혁명 동지들의 ‘4.19 그날의 육성 기록을 실었다.
3장은 4.19 직후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까지 다루었고, 4장은 혁명열사 노희두를 기려온 여러 가지 행적과 노력들을 정리했다.
305쪽으로 된 이 책에는 혁명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30여 컷의 사진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노희두 열사와 함께 했던 당시 영어영문학과 학생의 육성기록 일부를 보자.

경찰의 총격이 시작되자 동국대 시위대는 뒤로 물러나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후미의 약 5백 명은 경찰의 발포를 위협용으로 판단했는지 대오를 갖추어 앞으로 나오려고 했다. 다시 경찰로부터 총격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위협 사격이 아니라 시위대를 겨냥한 조준사격이었다.
이 총격으로 '동국대학교'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있던 학우 한 사람이 쓰러졌다. 노희두였다. 법학과 3학년 노희두가 4.19혁명 최초로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흉탄에 쓰러진 것이다.
노희두의 첫 희생이 있고나서부터 여기저기서 학우들이 쓰러지고 경무대 앞길은 온통 붉은 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69)

▲국립4.19민주묘지 1묘역에 있는 노희두 열사 묘
▲기산면 두남리 뒷동산에 있었던 노희두 열사 묘.

이승만 정부는 419일 오후 240분경 전국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군사령관에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중장)이 임명되었다. 경찰의 발포는 오후 140분경이었다. 그러나 오후 1시로 소급해 발동했다. 이는 경무대 앞에서 군경이 저지른 만행을 마치 계엄령하에서 이루어진 정당한 공권력 집행인 듯 얼버무리려는 이승만 정부의 얄팍한 꼼수였다.(245)

매년 419일이면 서천초등학교 교정 동쪽에 있는 노희두 열사 추모비 앞에서 서천에 살고 있는 동국대학교 동문들과 민예총 서천지부에서 추모제를 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