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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 주칠(朱漆) 용교의(龍交椅) 금칠(金漆) 어용상(御龍床) 금칠(金漆) 용교의(龍交椅)
 김민수
 2013-12-14 13:58:45  |   조회: 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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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 주칠(朱漆) 용교의(龍交椅) 금칠(金漆) 어용상(御龍床) 금칠(金漆) 용교의(龍交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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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앉는 자리는 어용상(御龍床)과 용교의(龍交椅)가 있으며 조선국 국왕은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과 주칠(朱漆) 용교의(龍交椅)를 사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제는 금칠(金漆) 어용상(御龍床)과 금칠(金漆) 용교의(龍交椅)를 사용하였다.1410년 9월 9일 이서(李舒)가 졸(卒)하였다. 과거에 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가 태종이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에 황릉욕(黃綾褥)를 깐 것을 보고 황릉욕(黃綾褥)에 앉지 말라고 하였었다. 1417년 10월 6일 예조 참판(禮曹 參判) 허조(許稠)가 술이 취하여 두 번 술을 올리어 주상의 덕을 칭송 찬미하고자 하고 은덕을 후하게 입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핍근(逼近)하니 도리어 무례한 형상이었다. 여러 재상이 모두 꾸짖어 금하여도 허조가 물러나지 않았다.





1471년 1월 26일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인 중궁(中宮)이 한명회(韓明澮)의 집에 거둥하니 승지(承旨)·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하는 주서(注書)·사초를 쓰는 예문관 검열인 사신(史臣) 각각 1원(員)과 여러 관사(官司)에서 각각 1원(員)이 어가(御駕)를 수행하였다. 북쪽 마당의 구름차일을 치고 사방을 휘장으로 둘러막고 바닥을 높인 다음 자리를 펴고 그 가운데에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 또는 용교의(龍交椅)를 마련하는 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인 장전(帳殿)에 나아가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는 서쪽의 붉은 칠을 한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에 앉고 한명회(韓明澮)의 부인(夫人) 민씨(閔氏)는 동쪽의 검은 칠을 한 흑칠 평교의(平交倚)에 앉았다.1567년 7월 3일 선조가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가 2-3회 권한 다음에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에 올라 백관들로부터 하례를 받았다. 1659년 5월 9일 영의정 정태화가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으로 올라가 앉을 것을 청하니 현종이 비로소 앉아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예를 마치었다.









1830년 9월 15일 순조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왕세손(王世孫)을 책봉(冊封)하였다. 왕세손(王世孫)을 책봉하는 의식 하루 전에 액정서(掖庭署)에서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을 인정전의 북쪽 벽(壁)에다 남향(南向)으로 설치하고, 보안(寶案)은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 앞에 동쪽 가까이 설치하고, 두 개의 향안(香案)을 인정전 밖 좌·우(左右)에 설치하며, 교명책(敎命冊)·인안(印案) 각각 1개를 보안의 남쪽에 설치한다. 교명안(敎命案)은 북쪽에 있고 책안(冊案)은 그 다음에, 인안(印案)은 그 다음이다.





1877년 12월 6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통명전(通明殿)에서 진찬(進饌)을 거행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익선관(翼蟬冠)에 5조룡(五瓜龍)을 수놓은 홍룡포(紅龍袍) 차림으로 소차(小次)에 들어갔고, 세자는 쌍동계(雙童䯻), 공정책(空頂幘)에 4조룡(四瓜龍)을 수놓은 흑룡포 차림으로 소차에 들어갔으며, 왕비(명성황후 민씨)는 머리꾸미개 수식(首飾)을 하고 적의(翟衣) 차림으로 소차에 들어갔고, 대왕대비 전하는 머리꾸미개 수식(首飾)을 하고 적의 차림으로 대차(大次)에 들어갔다. 시간이 되자 여집사(女執事)가 세자에게 소차에서 나와 절하는 자리에 들어가 북쪽을 향하여 설 것을 청하였고, 여관(女官)은 왕비(王妃)에게 소차에서 나와 절하는 자리에 들어가 북쪽을 향하여 설 것을 청하였다. 여집사는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에게 소차에서 나와 절하는 자리에 들어가 북쪽을 향하여 설 것을 청하였으며, 상의(尙儀)는 대왕대비 전하에게 대차(大次)에서 나올 것을 청하였다. 음악이 연주되자 상궁(尙宮)이 앞에서 인도하여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으로 올라갔으며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 왕비, 세자가 네 번 절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대원군(大院君)과 대부인(大夫人)은 네 번 절하는 예를 거행하였고, 좌우 명부(左右 命婦)와 종친(宗親), 의빈(儀賓), 척신(戚臣), 진찬소 당상(進饌所 堂上)과 낭청(郞廳)이 네 번 절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통명전(通明殿)에서 야진찬례(夜進饌禮)를 거행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익선관(翼蟬冠)과 5조룡(五瓜龍)을 수놓은 홍룡포(紅龍袍)를 착용하고 꽃가지인 화타(花朶)를 머리에 꽂는 삽화(揷花)하였다. 시간이 되자 여집사(女執事)가 청하니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소차(小次)에서 나와 절하는 자리인 배위(拜位)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섰다. 상궁(尙宮)이 청하니 대왕대비(大王大妃) 전하가 대차(大次)에서 나왔다. 음악이 연주되자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니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으로 올라갔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대왕대비(大王大妃)에게 네 번 절하는 4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1902년 5월 30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경운궁(慶運宮)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외진연(外進宴)을 받았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익선관(翼蟬冠)에 용의 발톱이 7개인 7조룡(七瓜龍)을 수놓은 황룡포(黃龍袍)를 갖추고 금칠(金漆) 어용상(御龍床)에 오르자, 헌가(軒架)가 보허자(步虛子)를 연주하였다. 황태자(皇太子) 이하 종친과 문무 관리 3품 이상으로 자리에 있던 자들이 국궁(鞫躬)하고 4배(四拜)하였다.1907년 3월 11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경운궁(慶運宮)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영친왕(英親王)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輿)를 타고 건원문(乾元門)을 나와 중화전(中和殿)의 월대(月臺)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려 금칠(金漆) 어용상(御龍床)에 올랐다.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正殿)과 국왕이 정사(政事)를 보는 편전(便殿)의 북편 중앙에 위치한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은 국왕이 앉아 문무백관(文武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조회(朝會)를 행하며 집무를 보는 국왕이 앉는 자리로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을 놓는 공간인 당가(唐家 : 텅 빈 당집)의 구조는 어탑(御榻) ·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 · 보개(寶蓋)로 구성하고 있다. 당가(唐家)는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 위에 떠있는 보개(寶蓋),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을 올려놓는 부분을 어탑(御榻)이라고 하며 보개(寶蓋)의 천장에는 쌍용(雙龍)을 조각해 놓았다.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의 뒤에는 나무로 만든 3절곡병(三折曲屛)을 두고 그 뒤에 왕실의 무병장수와 번영을 축원하는 일월5악병(日月五嶽屛) 칸을 막아 끼우는 장지문인 장자(障子)를 둘렀는데 그 장지문을 열어두고 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일월5악도(日月五嶽圖)에는 국왕인 붉은 해와 왕비인 흰 달, 백두산,묘향산,금강산,삼각산,지리산의 5대 명산 5악(五嶽), 백성을 상징하는 폭포,파도 등의 물, 충신을 상징하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어 신성과 위엄을 갖추고 있다. 조선국은 즉위식(卽位式),조참(朝參)에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殿) 정문(正門)의 중앙에 남쪽을 향하여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을 마련하고 좌우에 대형 향로(香爐)와 향합을 놓는 향안(香案)을 설치하였다. 고조 광무제는 1897년 10월 12일 조선국의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이 아닌 금칠(金漆) 용교의(龍交椅)에 앉아 대한제국 1대 황제에 등극하였고 정전인 중화전 당가에는 금칠(金漆) 어용상(御龍床)을 놓았다.1921년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창덕궁 신선원전으로 어진을 이안한 경운궁 선원전에도 금칠 어용상(御龍床)과 금칠(金漆) 용교의(龍交椅)가 있었다.조선국은 태평관 정청에 국왕의 자리에 주칠(朱漆) 용교의(龍交椅)를 놓았다.



조선국(1393-1897)은 국왕즉위식(國王卽位式),조참(朝參)에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殿) 정문(正門)의 중앙에 남쪽을 향하여 의식행사용 이동식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을 마련하고 좌우에 향로와 향합을 놓는 향안(香案)을 설치하며 정전(正殿) 정문(正門)의 중앙에서 거행하는 국왕즉위식(國王卽位式)에서 정전(正殿) 정문(正門) 중앙의 의식행사용 이동식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으로 올라갈 때는 오른쪽 계단을 이용하였다. 즉위(卽位)란 정전(正殿) 정문(正門)의 국왕이 앉는 의식행사용 이동식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으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고 즉위(卽位) 때에 오른쪽 계단을 이용하기 때문에 즉조(卽祚)라고도 한다. 국왕이 정전(正殿) 정문(正門)의 주칠(朱漆) 어용상(御龍床)에 상좌하는 순간 국왕즉위식(國王卽位式)을 거행하는 정전(正殿) 정문(正門) 앞을 가득 메운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은 조선국이 천년 이상 영원하라는 의미의 천세(千歲) ! 천세(千歲) ! 천천세(千千歲) !를 두 손을 들며 외치는 산호 천세(山呼 千歲)하였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금칠(金漆) 용교의(龍交椅)에 올라앉는 상좌(上坐)하여 황제에 등극하자 황제 등극(登極)시에 나라에 큰 의식이 있을 때 황제의 축수(祝壽)를 표하기 위하여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비는 뜻에서 신하들이 두손을 치켜들고 만세(萬歲)! 만세(萬歲)! 만만세(萬萬歲)!를 일제히 크게 외치는 산호 만세(山呼 萬歲)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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