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는 남한에서 출산부를 죽이고 간과 심장을 꺼내 미국놈에게 팔고 있다고도 선전하고 있다. 많은 북한 주민들은 이같은 선전에 속아 자기집이 제일 좋고 북한사회가 낙원이라고 믿고 있다.
귀순후의 소감은 ?
[답] 북한이야말로 암흑이요 , 생지옥이란 것을 알았다.
지난 1일 국군의날 행사를 보고 체격이 건장한 국군들의 씩씩한 모습에 놀랐다.
[ ....... 거지가 득실거리고 어린이들이 깡통을 차고 쓰레기를 뒤지며, 학교가 아닌 구두닦이로 살아야 하는 썩고 병든 자본사회 .......... ]
‘88올림픽’은 북한에 큰 충격 ㆍ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4-05-26
북한 헌법에 대한민국을 남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영토로 규정하고 ‘남조선’으로 명한다. 또한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이며 남한에 세워진 정부는 미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라고 주민에게 가르친다. 오직 1948년 9월 9일, 김일성에 의해 창건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남북을 대표하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권이란 의미다.
70년대까지는 거지가 득실거리고 어린이들이 깡통을 차고 쓰레기를 뒤지며, 학교가 아닌 구두닦이로 살아야 하는 썩고 병든 자본사회는 이승만과 같은 매국역적들이 남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팔아먹었기 때문이라는 북한의 선전이 먹혔던 것 같다. 나도 80년대 초 중학교를 다니면서 남조선은 사람이 못 살 생지옥이고 미국이 지배하는 식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북한 주민과 군인들이 남한 정부에 대한 인식에서 혼돈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88올림픽이 남한에서 진행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을 때다.
여단 기통수(문서 수발병)가 대대에 가져온 노동신문으로 아침 독보모임을 가졌는데 남조선의 올림픽 단독 개최는 두개의 조선을 조작 책동하려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미제의 두개 조선 조작책동의 일환으로 또다시 남한의 괴뢰정부가 세계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려 한다는 내용이었지만 받아들이는 군인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독보모임이 끝난 다음 군인들의 얼굴은 뜻밖의 소식에 놀라 경직되어 있었다. 국제적인 큰 행사를 남한에서 한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인데, 북한에서 공동개최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니 스스로 모멸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남한의 올림픽 소식에 사회는 물론 군부도 술렁거렸다. 북한 당국이 이런 분위기의 반전을 위해 제13차 세계청소년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한다고 발표했지만 올림픽과 청소년 축제를 비교해 볼 때 의문을 풀 수 없었다.
게다가 남한에서는 88올림픽을 치르고 부자가 됐다는 소문과 북한은 세계청소년축제를 하고 국고가 거덜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남한 정부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던 것 같다. 물론 나처럼 생각하는 군인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모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무시무시한 생지옥 남조선으로 간다면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던 처남이 한국의 참모습을 보고 의아해 하는 광경이나 김씨가 "공화국 북반부와 남반부를 대비하여 볼 때 거꾸로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상봉한 누님에게 실토한 것은 북괴가 얼마나 주민들을 기만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김씨의 13살난 막내 아들은 또 "남조선에 거지들이 득시글거리고 미제가 착취하며 , 그래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줄줄이 외어 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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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조선에서는 간장 된장을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 헛살아 왔다"는 말은 북한주민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보인다.
또 "이렇게 좋은 옷은 처음 입어봤다" "좋은 옷 입어 보고 비행기도 타 보았으니 이젠 더 이상 소원이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너무 좋다" "마치 큰 잔치를 벌이고 있는 기분"이라는 말들은
서울생활소감을 한마디만 더하라면 나는 서울사람들이 너무도 북한의 실상을 모른다는 점을 말하고싶다.
서울시민들은 내가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럴때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 얘기 또한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서울의 호텔에서 첫날밤을 맞았을때 수세식화장실 사용법을 몰라 당황했었다.
북한의 주택은 공동주택이다. 방2칸, 부엌1칸씩을 하모니카처럼 엮어놓았다. 인민반 (30가구)마다 설치된 화장실은 겨우 2칸. 물론 재래식이다. 30가구 1백50여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2칸뿐이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 아니다.
목욕탕 사정도 한심하기 이를데없다.
청진시내에는 각구역별(인구5만∼10만) 로 공동목욕탕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연료사정 때문에 대부분 개점휴업상태다. 1주일에 한번(일요일) 문을 여는데 그날이면 목욕탕은 콩나물시루가 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목욕탕사용을 아예 포기하고 집에서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몸을 씻는다.
생필품 공급사정도 엉망이다. 세탁비누의 공급량은 연간 5장. 6개월도 채못돼 바닥이 난다. 주민들은 아직도 명태·정어리기름등에 가성소다를 섞고 이를 끓여 비누를 만들어 쓴다. 이때문에 주민들의 옷에는 항상 쾌쾌한 비린내가 배어있다.
그러나 당간부들은 사겅이 다르다. 북한에는 「8·9호제품생산기업소」가 있다. 당간부들에게 특별공급하는 식품·피복·생필품등을 전문생산하는 공장을 말한다. 또 이 기업소 노동자만을 특별검진하는 「8·9호검진대」란 것도있다. ·
이밖에 가까운 연간에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고 고래 등같은 기와집에서 살게하겠다는 말이 25년도 넘었는데 인민들은 먹을것조차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실을 아느냐. 당간부들은「옛날 혁명시절에는 조밥에 된장을 찍어먹고도 강고하게 혁명을 했는데, 왜 일들을 열심히 하지않느냐」고 하지만 조밥에 된장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죽보다 낫겠다.
어느날 우리 윗집에서 살던 할머니가 먹지 못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소금을 얻으러 우리집에 왔다. 그 할머니는 역시 굶고서 맥없이 누워 있는 나를 보고는 눈물이 글썽해서 “기자선생, 이렇게 살 바엔 살아서 뭘 하겠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나는 일제 때에도 살아보고 6·25전쟁도 겪어보았지만 지금처럼 굶어보기는 처음이요. 일본놈 때에는 그놈들만 이밥을 먹고 조선사람들에게는 좁쌀만 주는 것이 괘씸했지만 배를 곯지는 않았어. 일제 때만도 못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1965년 1월 7일 평양에서 부친 최윤권, 모친 허문하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나는 출생과 함께 계급적 성분이 지주라는 낙인이 찍혀서 나의 앞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북한의 모든 주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란 평등한 사회라고 하지만, 앞에서는 그렇게 선전을 하고 뒤에서는 안전부, 보위부의 가계문건에다 적어 놓아 그런 사람은 영원히 발전을 할 수가 없게끔 제도적으로 규제하고 있어,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에도 갈 수가 없었고 군대에도 못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형님도 역시 군대와 대학에서 제외되니 힘겨운 중노동 부문인 증기기관차 승무원으로 10여 년을 일하면서도 성분이 나쁘기 때문에 그렇게도 하고 싶어 했던 입당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먹는 문제는 어떠합니까? 전쟁준비라고 하면서 한 달에 4일 분씩을 떼고 공급해주는 식량마저 제대로 주지를 않아 우리는 정말 배고픈 생활을 해왔습니다. 어머님은 그래도 어떻게 하면 자식들을 굶기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신 끝에 옆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식량을 구해 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인류의 역사 이래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소리 없는 독재(폭압)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인민들을 기만하고 허위선전만 보도하면서, 인민들에게 적개심만을 불어넣어주고, 자신은 호의호식 속에서 자신의 실책을 은폐하면서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념하고, 인민들에게는 딴 생각을 못하도록 다그칩니다.
또한 김일성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왕조 족벌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수많은 권력기관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비위에 약간이라도 거슬린다거나 말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정치범이니 뭐니 하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깊은 산골에다 생매장을 시킵니다.
불만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계급적 토대가 나빠 말없이 일을 열심히 하고 당에 충성을 하였으나 입당을 못했던 한두 사람을 골라 입당 시키고는, ‘영광스러운 우리 당에서는 옛날에 과오를 범했거나 출신 성분이 나쁜 사람들을 넓게 교양, 개조하면서 당에 입당시킨다,’ 고 말하면서 인민들을 기만하고 충성을 강요하는 양면전술을 쓰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조금씩 주어 별 재간 없이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며,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남한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 충격적인 사실은 내가 이제껏 듣고 알고 있던 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과 ‘내가 속았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남한은 내가 생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남한에 가면 우선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고, 실업자가 거리를 넘치고, 인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거리와 골목에서 대낮에도 쓰러지고, 어린이들은 학비가 없어 깡통을 차고 거리나 헤매고 구두닦이, 신문팔이로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 가며, 병이 나도 돈이 없어 병원은 문 앞에도 못 가보고 죽어간다는 선전만을 들어왔는데, 막상 남한에 와보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휴식 외에는 계속 힘든 노동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휴식 날에는 온가족이 함께 거리로 나들이 나갈 시간도 없이 집안 청소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절 같은 날은 나들이를 간다 해도 승용차는 물론 남한에서 그 흔하고 흔한 버스조차 소수량에 불과해 거의 탈 수가 없습니다.
상점에 나가보면 매점 안에 물건을 진열만 해 놓았을 뿐 판매하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생활필수품인 치약, 칫솔조차 판매하는 곳이 없어서 소금으로 닦거나 부러진 칫솔을 붙여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민들은 집이 없어 가정을 이루고도 합숙생활을 하거나 따로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에서 입는 옷들은 다 떨어진 옷이며 신발등도 엉망입니다.
김일성의 정치는 인민들을 더욱 더 감시의 굴로 몰아넣는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육이오가 일어난 지 40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잘못을 지금까지 추궁하고 비위에 거슬리면 추방시킵니다. 이쯤되고 보니 조금이라도 성분이 나쁜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가 없이 보이지 않는 감시 속에 살고 있으면서 인민들은 먹지 못해 온갖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병이 없는 나라, 마음껏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매일 남한 방송을 듣고 벽에는 남한 말씨를 적어 놓고 연습했다. 옷차림도 중류부인으로 행세하라면서 모시 치마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서울 시민증을 휴대토록 했다.
어느 날 평양을 출발, 원산에 도착했다가 밤 12시에 강원도 해안 보리밭에 상륙했다. 보리밭에서 옷을 갈아입고 큰길로 나오자 15세쯤 처녀가 소를 몰고 그냥 지나갔다. 낡은 군모에 와이셔츠 입고 손목시계 찬 청년도 무심코 지나갔다. 2시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서울행 버스를 타고 보니 모시 치마저고리 차림은 한명도 없었다. 기관원이 쓰고 다닌다는 ‘검은 안경’은 엿장수도 쓰고 다녔다.
버스 안에서 라디오방송이 흘러나오니 놀랄 지경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장으로 가니 천당에 온 느낌이었다. 고기와 먹거리가 넘쳤다. 새로 옷을 사고 파라솔과 핸드백도 사고 미장원 가서 머리도 다시 손질했다.
처음 시내에서 퍽 놀란 것은 많은 시민이 나일론을 입고 신고 있다는 사실이었읍니다. 저렇게 비싼 물건을 대부분의 시민이 사용하고 있다니 모를 일이고나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주 싼 물건이었읍니다. 이북에도 나일론은 있지만 값이 비싸 도저히 입을 수 없읍니다.
재일교포들이 나일론으로 휘감고 쭉쭉 뽑고 이북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쪽에 살고 있는 북한 인민들을 복고 이상히 여겼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북한 인민들은 여기다 내 놓으면 거지나 다름 없는 옷차림 뿐입니다. 어떤 교포는 평양 역전에 있는 커다란 백화점을 사자고 그랬는데 이 소리를 듯고 점원들은 모두 폭소했읍니다. 어떤 자는 잘 팔리는 국수집에 가서 그집과 아울러 운영권을 팔라고 하다 조소를 당하기도 했읍니다. 이 사람들은 도무지 실정을 하나도 모르고 온 사람들이었읍니다. 이북에서 개인사업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읍니다. 정말 한심하지요. 전부가 속아서 넘어간거나 다름없어요.
그 곳은 돈을 가져도 물건이 없어서 못사지만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풍부한 상품을 가진 곳이 곧 이곳입니다.
오후 다섯시가 넘으면 그때부터는 내 시간입니다. 조용한 숙소에 누어서 어린 시절부터 내가 자라온 여러 고비를 되살려 보며 이게 정말 생시인가 꿈인가 한번 꼬집어 보고 만족하며 그리고는 꿈결에서 현실의 나를 발견합니다. 이때마다 이북에 있을 때 다섯시만 지나면 그놈의 '회'(모임)에 끌려 다니던 지긋지긋한 기억이 솟아 오릅니다.
북한 청소년들은 요즈음 너무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음이 지난달 30일 귀순한 여만철씨 일가의 3자녀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이들은 11일 서울신문과 가진 회견에서 한창 자라야 할 나이에 제대로 먹지못해 키가 크지 않았고 굶주림과 다그치는 사상교육으로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 녹아떨어지기 일쑤라고 말했다.금주(20),금룡(18),은룡(18) 3남매로부터 북한 청소년들의 생활상과 북한의 실상을 들어보았다.<편집자주>
서울을 둘러본 느낌은.
▲금주=모든 것이 너무 놀랍다.내가 살던 함흥에선 보지 못했던 고층건물이 너무 많아 놀랐다.특히 자동차가 어찌나 많은지 차가 빠지지 않아 차속에 앉아 있는 게 답답할 정도였다.여성들의 옷차림 색깔과 형태가 너무나 다양한 것도 북한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금룡=북한에서 남한에 대해 「교양」받은 것과는 1백80도 달랐다.서울엔 아파트도 없고 거지가 많으며 어지럽다고 들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남한의 어린 학생들이 껌팔이나 구두닦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배웠지만 역시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은룡=밤거리가 너무 화려해 놀랐다.북한에선 가정집에서도 전기를 아끼느라 밤에도 불을 켜지 않기 일쑤인데 남쪽에선 길가 상점의 간판이 번쩍번쩍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셋다 키가 작아보이는데.
▲금룡=내 키는 1백51㎝로 북한에서 학교동무들과 비교하면 중간쯤은 된다.그러나 여기와서 보니 내키가 말못할 정도로 작다는 것을 알았다.중학생이라고 하는 학생의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장 1백51㎝ 중키
▲금주=내 키는 1백58㎝로 북한에선 큰 축에 들었는데 서울의 학생들에 비해선 작은 것 같다.학교에 가면 선생님들도 우리보고 『너희들은 우리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작다』고 말할 정도로 북한에선 갈수록 학생들의 키가 작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먹을 것을 제대로 못먹다 보니 키가 안자라 지금 인민학교 학생들은 옛날의 유치원 학생들 키보다 더 작아진 것 같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금주=남한이 북한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은 북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그러나 구체적으로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모른다.나 자신도 다른데에 가보지 않고 북한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만 살았고 외국영화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바깥 세상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는 정확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한번 가본 적이 있는 평양이 지구상에서 제일 훌륭한 도시라 생각했으나 서울에 와서 보니 이곳이 지상의 천국으로 느껴졌다.
내가 북한에 살면서 느낀 가장 큰 실망은 “김정일이 있는 한 대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굶어야 하는지, 우리 나라(조선)가 왜 지지리도 가난해야 하는지를 알아도 말할 곳이 없었다. 아무리 살자고 발버둥쳐도 희망이 없었다.
그리고 체제의 폐쇄성은 인간의 창의력과 자유의 욕구를 말살시키고 있다. 우리만 굶고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체제를 반대하려고 애썼겠지만,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접할 수 없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던 것이다.
북한에 있을 때 회령과 혜산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고 살아 내 딴에는 중국을 안다고 자부했다. 국경지역 도시로 볼 때 제일 큰 도시가 중국 단동이 대표적이지만, 함경남도에 살고 있던 나는 신의주에 별로 다니지 않았다. 그냥 육안으로 중국물건을 보고 중국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시와 농촌이 그렇게 발전했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넘어서 깜짝 놀랐고,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는 뒤로 자빠질 만큼 놀랐다. 그야말로 내가 그리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었다. 바깥세상의 판사를 모르니 내가 밥술이나 먹고, 생활이 순탄했다면 탈북도 하지 않고 거기서 모여 살았을 것이다. 나의 생애에 가장 큰 시련이었던 ‘고난의 행군’이 없었다면 나는 중국을 몰랐을 것이고 또 한국이 천당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나그네(남편)가 사망된 다음에 살기가 곤란해가지고 자식들이 중국으로 탈북을 했거든요. 하루는 누가 아이들 편지를 가지고 왔어요. “자기들은 중국에 와서 잘 있는데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어머니 연변까지 언제까지 와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따라간 게 온성이야요.
온성에 오니까 그때서야 (안내자들이) 솔직히 말해요.“어머니 아들이 남조선에 있는데 거기서 편지를 쓴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나는 아직까지 무산에 살면서 중국에 한번도 못 가보고 그랬으니까 여기 남한 사회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어요. 그저 수 십 년 동안 교육받은 게 “남조선은 사람 못살 곳이고, 거지떼가 욱실(득실)거리고, 미국놈들의 박해 밑에서 신음하고 있고.” 그런 것만 교육받았기 때문에 여기에(남한) 대해서 영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난 깜짝 놀랐어요.
“거기에(남한) 우리 아이들이 왜 갔는가”하니까, (안내자가) “어머니 거길 몰라서 그렇지 거기가면 천국이다”고 그래요. (안내자가) 아들하고 전화통화를 연결시켜주겠다”고 그래요. 전화통화를 해보니 아들이 “어머니 여기 오시라”고 그러는 거예요. “여기 오면 진짜 낫다”고.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거기 가면 위험하지 않니” 그렇게 물었어요. 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강연들은 게 있거든요. 탈북자들 거기 가면 다 죽인다는 거. 들은 게 있기 때문에 망설였단 말이야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그냥 오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5월 말에 두만강을 넘었어요.
대체로 다 믿지요. 어떻게 안 믿어요. 직접 (남한에) 자기가 다녀 보지 않았는데. 사람이 계속 그런 선전하는데. 거기 사람들은 믿는단 말이야요. 다 믿어요. 중국에나 갔다와서 남한 소식이나 듣고 텔레비전으로 (남 몰래) 남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조금 이해가 갈지 모르겠는데 이내 하나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안 믿어요. 강연을 하면 하는대로 “그런가 보다, 그렇구나” 그렇게 믿는데.
* 무산 같은 국경지역은 중국과 가깝기 때문에 외부소식을 듣기에 유리하다. 그래서 내륙지역에 있는 사람보다 중국이나 한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중국이나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천공항에 내렸는데, 난 무산에서 비행기 한번 보지도 못했어요. 항공기는 이루 말 할 수 없고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난 놀랐어요.
“야 (북한에서는) 사람 못 살 곳이라고 했는데”. 눈이 막 빙글빙글 돌아가고. 야 정말 난 꿈이라고 생각돼요. 지금까지. ‘야 나 진짜 꿈을 꾸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되고. 내 여기 온 게 정말 잘한 일이고 정말 북한에서 선전한 게 다 틀리고, 180도 틀리고. 이렇게 잘 사는 나라인지 몰랐어요.
여기에 대해 정말 나쁘게 생각했는데. ‘남조선은 무서운 곳이고, 자본주의 나라고, 미국놈들의 박해 밑에서 신음하고 있고. 여기와 보니까 사람들도 북한사람들과 똑같고 좋은 사람들도 많고.
북한 주민들은 천명도 되지 않는 외국인 체류자가 많은 인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 작은 숫자입니다. 2014년 4월을 기준으로 남한에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들은 164만 명에 달합니다.
노동 신문과 같은 북한 선전수단을 주로 접하는 북한 주민들은 남한의 이와 같은 통계를 알게 되면 미국인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너무 몰라서 하는 생각입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남한에 생각보다 미국인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깜짝 놀라곤 합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남한에 체류하는 미국사람들은 전체 외국인 인구의 9% 정도에 불과합니다.
제일 많은 체류자들은 중국사람들입니다. 외국인 체류자 164만 명 중 중국사람들은 83만 명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업이나 유학 때문에 온 사람들도 있고 친척방문 때문에 온 조선족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사람 대부분은 남한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에 와 있는 중국사람 4분의 3은 노동자들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남한에 많이 오는 이유는 높은 소득 수준 때문입니다. 중국 노동자들은 남한 사람들이 어려워하거나 위험하여 기피하는 일들을 맡아 합니다. 중국 노동자들은 보통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매월 150만 원에서 200만 원 정도의 임금을 받게됩니다. 미국 돈으로 보면 1,500달러나 2,000달러에 해당됩니다. 잘 사는 남한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별로 큰 돈이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은 이 정도의 돈을 벌기 위해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들은 중국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2014년 4월 현재 한국에는 12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또한 어려운 노동일을 하는 노동자들입니다. 구소련 지역에 속했던 우즈베키스탄 사람 4만 명, 필리핀 사람은 5만 명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비슷하게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미숙련 노동자들입니다.
물론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 체류자들이 노동자들뿐만은 아닙니다. 외교관이나 유학생들 그리고 한국회사에 다니는 외국인 회사원들까지 참으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외국인들이 거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체류자의 구성을 보면 노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
한국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93만8000여명(지난해 5월 기준)에 달한다. 이주노동자에서 ‘이주고용주’로 꿈을 이룬 사람도 늘고 있다. 한국이 기회의 땅이 된 이면에는 파독 간호사들의 눈물이 있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는 1만14명에 달했다. 3년전 파독된 광부보다 2078명이 많다. 당시 20대 초·중반이던 간호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생이별하고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실업률이 23%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독일에서 받은 월급의 50~80%를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0달러가 채 안 되던 가난한 조국에 송금했다. 파독 근로자들이 송금한 누적액은 1억153만달러였다. 이는 미국의 무상원조가 끊겨 외화에 목말라 하던 한국에 큰 힘이 됐다.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근로자들의 급여가 재빠르게 인상돼 전체 국내 근로소득자 급여의 72%에 달했다. 또 연말정산을 한 외국인 근로자수도 처음으로 50만명을 넘어섰다.
3일 국세청 ‘2014년 국세통계연보’를 보면 연말정산을 한 외국인 근로자 평균 급여는 2290만원으로 전년(2130만원)보다 7.2%인 160만원이 증가했다. 이같은 증가율은 같은 기간 국내 전체 근로자 임금 증가율(4.3%)과 증가폭(130만원)을 앞선다. 외국인 근로자의 평균 급여는 2010년 1730만원에서 2011년 1820만원, 2012년 1960만원 등으로 가파르게 오르다 지난해 처음 2000만원을 넘어섰다.
외국인 근로자수도 2010년 40만4000명에서 지난해에는 50만8000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이에따라 외국인 근로자가 받아가는 급여총액도 늘어 2011년 6조9897억원에서 지난해에는 11조8080억원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국내 근로시장에서 차지하는 외국인 근로자의 비중이 갈 수록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다.
외국인을 포함한 국내 전체 근로소득 연말정산자의 평균 급여액은 3170만원으로 전년(3040만원)에 비해 4.3%인 130만원 증가했다. 전년대비 급여 증가속도나 증가폭이 외국인근로자에 미치지 못했다. 전체 근로자의 평균급여액은 2010년 2610만원에서 2011년 2790만원, 2012년 2960만원 등으로 늘어났다.
외국인 근로자 임금상승은 특히 2013년 이후 가파르다. 이에따라 전체 근로자 임금 대비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은 2010년 66.3%에서 2013년 처음으로 70%를 넘어섰다. 2014년에는 72.2%까지 올라왔다. 외국인 근로자의 급여 상승은 고소득 외국인 유입이 많았거나 저임금 외국인 근로자의 소득 증가가 가팔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연합뉴스) 현영복 기자 =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귀화자 등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가 150만 명을 처음 돌파했다. 국민 100명 가운데 3명꼴로 외국인인 셈이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미군, 관광객, 산업연수생 등 외국인은 38만여 명 수준에 불과해 우리 사회의 이방인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현재는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이 국내 총인구의 3%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급증, 한국 사회는 외국인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진입했다.
10일 법무부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체류 외국인은 9일 현재 150만 1천761명을 기록, 150만 명을 처음 넘어섰다.
지난 2003년 체류 외국인이 67만 8천687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년 만에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2배 넘게 급증했다.
국제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체류 외국인 수가 꾸준히 늘었고, 재외동포를 위한 방문취업제가 도입된 2007년에 체류 외국인 수가 106만 6천여 명을 기록하며 외국인 1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체류 외국인을 국적별(4월말 148만 6천367명일 당시 기준)로 보면 한국계를 포함한 중국(49.9%) 출신이 절반가량을 차지해 가장 많았다.
이어 미국(9.3%), 베트남(8.1%), 일본·필리핀·타이(각각 약 3%), 우즈베키스탄(2.5%), 인도네시아(2.3%), 몽골(1.8%) 등이다.
이들 가운데 불법체류자는 17만 9천516명이다. 불법체류자는 2004∼2008년 20만 명을 웃돌았으나 2009년 이후에 17만 명 안팎 수준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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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인교준 기자 = "한국서 돈 벌어 고향에 가겠다는 것이 과거 추세라면 한국 정착이 최근 추세다."
중국 동포(조선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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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변화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겠다는 중국 동포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뜨내기 아닌 한국 사회의 주인이 되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를 포함, 헤이룽장(黑龍江)성과 랴오닝(遼寧)성 조선족 집거 지역이 급속히 쇠퇴하는 가운데 한국에 정착하는 중국 동포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서울 구로구 대림동은 물론 신림동, 신대방동, 자양동 건국대 주변, 그리고 경기도 수원역 부근, 성남 수진동, 안산 원곡동 등은 중국 동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중국 동포 타운이라고 할 수 있다.
◇ "중국 집 팔고 한국 집 샀다"…중국 동포 정착 트렌드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 및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재외동포가 국민에 준하는 법적 지위를 부여받고 근로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을 계기로 중국 동포의 국내 유입이 활발해졌다. 특히 2007년 방문취업제로 자유로운 출입국이 가능해지자 중국 동포의 입국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중 간 소득 격차와 임금 차이가 중국 동포의 돈벌이 한국행을 부추겼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말 현재 외국인 신분의 중국 동포 수는 60만 6천694명이다. 여기에 행정자치부의 작년 통계상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한 중국 동포는 7만 6천921명이다. 이를 합치면 70만 명에 육박한다. 이는 경기도 안산시 인구와 비슷하다.
눈에 띄는 건 돈벌이 후 귀국이 목적인 방문취업(H-2)은 갈수록 주는 추세라면 정착 목적의 재외동포(F-4), 영주자격(F-5) 등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방문취업 사증 취득자 수는 2007년 22만 8천686명에서 2009년 30만 6천283명, 2011년 29만 5천464명, 2013년 23만 739명으로 감소 추세가 뚜렷하다. 반면 재외동포 사증 취득자 수는 2007년 3만 4천695명에서 2013년 28만 130명으로, 영주자격 사증 취득자 수는 2007년 1만 6천460명에서 2013년 8만 7천497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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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포인 김용선 한중무역협회장은 "한국 이주 1세대라고 할 노년층은 돈 벌고 고향으로 돌아간 경우가 많다면 젊은 층은 정착을 택하는 사례가 많다"며 "나도 중국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 한국에서 아파트를 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조선족 공동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중 교류 확대와 우리나라 기업의 중국 투자 때문에 중국 동포들이 한국 기업이 있는 베이징(北京)·칭다오(靑島)·상하이(上海) 등지나 한국으로의 이주와 정착이 급증하면서 지린·헤이룽장·랴오닝성의 조선족 집거 지역은 해체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김 회장은 "헤이룽장 자무스시의 조선족 거주지인 탕왕향 13개 마을에 11개의 조선족 소학교(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1개만 남았을 정도이며, 그마저도 학생 부족으로 폐교 위기"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