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아가씨와 크레커.
 구경욱
 2002-04-20 22:46:02  |   조회: 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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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음악 (케논)




















어느 아가씨가



공원벤치에 앉아



고즈넉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노신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남아 있는 책을 마저 읽고 갈 참이었다.



가방에서 책과 함께



방금 전 가게에서 사온 크레커를 꺼냈다.



아가씨는 크래커를 하나씩 집어먹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아가씨는 크레커 줄어가는 속도가



왠지 빠르다 싶었다.



흘끔 곁눈질로 보니,



곁에 앉은 노신사도



크래커를 슬쩍슬쩍 빼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노인네가...?'



아가씨는 은근히 화가 났다.



하지만 무시하고



책을 읽으며 크래커를 꺼내 먹었는데,



그 노신사 역시 태연히 꺼내 먹는 것이었다.



눈은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지만



이미 아가씨의 신경은



크래커와 밉살스러운 노신사에게 쏠려 있었다.



크래커가 든 봉지는



두 사람 사이 벤치에서 서서히 비어갔고,



마지막 한 개가 남았다.



그녀는 참다못해



그 노신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뭐 이런 웃기는 노인이 다 있어?’



하는 강렬한 눈빛으로



얼굴을 붉히며 쏘아보았다.



노신사는 그런 아가씨를 비웃는 것인지



부드럽게 씨익 웃으며



소리없이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멀어져가는 노신사를 바라보며



별꼴을 다 보겠다고 투덜대던 아가씨는



벤치에서 일어나려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사가지고 온 크래커는



새 것인 채로 무릎 위에 놓여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는 자신이



그 노신사의 크래거를 집어먹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오히려 자기 것을 빼앗기고도



부드럽게 웃던 노신사.



하지만 그 노신사는



정신없는 그 아가씨에게 크래커를 빼앗긴 게 아니고,



사랑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제 것도 아닌데 온통 화가 나서



따뜻한 햇살과



흥미로운 책의 내용조차 모두 잃어버린 아가씨는



노신사에게 이 좋은 나눔,



즉 인간애를 빼앗긴 것이다.



비록 오백원짜리 크래커였으나



노신사와 아가씨의 그 차이는



결코 오백원 어치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스스로조차 모르게



아주 중요한 일을 겪게 된다.



그때 지금의 상황은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중대하고, 엄청난 차이인 것이다





2002-04-20 22: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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