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의남매 ‘빅-창순’ 40년의 우애
한·미 의남매 ‘빅-창순’ 40년의 우애
  • 이숙자 기자
  • 승인 2006.10.13 00:00
  • 호수 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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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에 인연이 되어 의남매를 맺었던 한국 소녀와 미국 소년이 40년의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어 극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현재 서천읍 사곡리에 거주하는 이창순(50세) 씨로 9살 때 기독어린이기금(CCF)을 통해 미국 피츠버그에 사는 ‘빅’이라는 소년과 의남매를 맺게 되었다.

빅이 어머니께 자주 용돈을 달라고 조르자 빅의 어머니는 “용돈을 모아 한국의 어려운 가정을 도와주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밖의 제안을 했고 마음씨 착한 빅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들 모자는 바로 기독어린이기금으로 연락을 하게 됐고 빅은 같은 또래의 어린이를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통해 동갑내기 의남매를 맺은 계기가 된 것이다. 그 후 빅은 10년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10달러씩 보내왔으며, 창순 씨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를 맞을 때면 큰 선물꾸러미가 도착하기도 했다.

창순 씨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탓에 쓸쓸하고 외로움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미국에 있는 의남매 빅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고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창순 씨는 성장해 ‘한국해외개발공사’에 취직, 5년6개월 동안 몸담고 근무하던 중 중매를 통해 남편인 신상배(55세) 씨를 만났다. 그 동안은 잠시 연락이 두절되는 듯싶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0년 평소 한국에 여동생이 있다며 보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안타까운 빅의 모습을 지켜보던 부인 캐시가 창순 씨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보라고 권유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그 편지는 이사를 간 창순 씨에게 수소문 끝에 어렵게 전해지게 됐다.
창순 씨는 반가운 마음에 이내 서투른 영어솜씨를 발휘해 답장을 보내게 됐고, 매일 이메일도 주고받았으며, 전화통화를 하는 등 인터넷을 통해 화상대화도 나누게 되면서 국적을 넘어선 이들 의남매의 정은 친남매 못지않게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2002년 빅은 창순 씨를 초청을 하기에 이르렀으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만남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지난 달 20일 빅을 만나러 인천공항을 향하는 창순 씨는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의 신기함과 설렘도 잊은 채 미국 피츠버그로 향했다.

피츠버그 공항에 도착 했을 때 누군가 등 뒤에서 “창순?”을 외쳤고, 마침내 낯선 이국땅에서 40년만의 극적인 의남매의 상봉을 이룰 수 있었다.

빅의 집에서 5박 6일 머무는 동안 빅은 금박지로 장식된 카드를 직접 제작해 초청장을 보냈으며, 누나를 비롯하여 이웃주민과 친구 등 30여명과 함께 멋진 파티를 열어 주었다.

빅은 현재 아버지 사업을 이어 광고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부인과 슬하에 2남을 두고 있었다.
또한 빅은 오는 12일 심장수술을 할 예정이며, 회복이 되면 한국에 와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창순 씨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창순 씨는 머나먼 이국땅까지 날아온 김에 세살어린 의자매 동생 안나를 만나기 위해 플로리다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마음만 있을 뿐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탓이다.

플로리다 공항에서 예전에 예뻤던 앳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안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금은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저택에서 알콩달콩 잘살고 있는 걸 보니, 언니 된 입장에서 마음이 놓이고 흐뭇했다고 한다.

동생 안나 집에서 10박을 하고 총15박 16일 동안의 미국 여행길은 마냥 설레고 가슴 벅찬 짧기 만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추석 명절이 돌아오는 터라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귀성행렬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발걸음만은 가벼웠다고 한다.
이창순 씨는 “귀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 한다”며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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