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하구둑 개설 그 이후 <제4회>
금강하구둑 개설 그 이후 <제4회>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10.13 00:00
  • 호수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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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포구의 생활환경사
하구둑 터 생태계 복원해야 미래 기약 가능

금강하구둑이 가져온 변화 가운데 하나는 금강이 내륙수로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환경기능마저 완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수역 생태계를 바탕으로 번성했던 수산업의 몰락과 함께 금강 하류지역의 수많은 포구들은 일시에 배가 닿지 않는 순수한 농촌 마을로 변했다. 금강하구둑 전후의 생활모습을 알아본다.<편집자>

철도에 밀린 내륙 수운 하천기능마저 완전상실

구석기시대인들의 삶의 터전

▲ 석장리 선사유적지. 금강과 주변 산록의 완사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구석기 전기(7만여년전)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1964년 봄 미국인 대학원생인 앨버트 모어는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 금강가를 답사하던 중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뗀석기를 발견하였다. 그 후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와 더불어 홍수로 인해 쌓임층이 무너진 곳에서 석기를 다시 찾아냈고, 이 해 11월 연세대학교박물관 발굴단에 의해 1974년까지 10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발굴 결과 석장리 유적에서는 B.C 7만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석기시대 전기와 중기, 후기의 문화층이 확인됐으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도 찾아냈다. 또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 조사된 신탄진 용호동 선사유적지에서는 약 1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에 해당하는 4개의 문화층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됐다. 이밖에 공주시 반포면 마암리의 용굴, 시목동, 소학동, 장기면 금암리 등지에서 다양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됐다. 이들 지역 외에도 금강과 그 지천 주변에서는 석장리와 같은 선사시대인들의 생활유적들이 곳곳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주변의 진천군 송두리에서 중기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금강 주변이 일찍부터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적합한 환경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미호천변에서 발견된 탄화볍씨. 1만5,000년 전의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공인받았다.
이처럼 유서 깊은 구석기문화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8~2001년 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미호천변에 있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일대의 문화재 지표조사 및 시굴 과정에서 1만 5,000년이나 된 탄화볍씨 59점이 나왔다.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인정받던 중국 후난(湖南)성 양쯔강 유역 볍씨보다도 2,0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국제 고고학회는 2003년 소로리 볍씨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공식 인정했다.

청주까지 범선 출입한 금강 내륙수로
인류가 수렵채취생활을 하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시작한 곳은 대개 소금을 얻기 쉬운 강하구나 바닷가였다. 그러나 금강을 거슬러 올라 내륙 깊숙이 들어가서 이 같은 선사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강하구 지역과 내륙간에 소금의 교역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금강은 수심이 깊고 경사가 완만하여 내륙수로 역할을 하는 데는 최적이었던 것이다.

금강유역의 수로는 금강본류를 타고 신탄진-회덕-옥천까지 배가 왕래했고 미호천을 거슬러 올라가 청주시 오근장까지 배가 출입했다. 이후 토사가 쌓이면서 1900년대에는 범선이 오갈 수 없게 되고 청원군 부용면 부강까지 거슬러 올라온 범선에서 작은 배로 중계해야 했다.

부강은 범선의 종착점이자 내륙으로 이어지는 중계 하항이었다. 이 무렵 부강-공주는 곡식 40-50석 정도를 실은 배가 오갈 수 있었으며 부여-강경 사이는 70석까지도 실은 배가 다닐 수 있었다 한다.

▲ 1911년 개통된 강경역. 금강 중심하항으로서의 강경포의 지위는 차츰 철도에 밀려나게 되었다. 중선배가 드나들던 물류의 중심 강경포조수가 닿는 곳에는 큰 도회가 들어섰다. 조선조 영조 때 이중환은 <택리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부여·은진에서 비로소 바다 조수와 통하여 백마강 이하 진강(鎭江:강경~금강하구) 일대는 모두 배편이 통한다. 은진·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서 금강 남쪽 들 가운데에 하나의 큰 도회로 되었다.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물건을 내어 교역한다. 매양 봄·여름 동안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을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 담처럼 벌여있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여 쌓인다.” ▲ 전국 3대시장의 하나였던 강경의 명성은 곰삭은 젓갈시장으로 남아있다.
오늘의 논산시를 바닷가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바다조수가 강경을 지나 출입하므로 들 가운데 여러 곳의 냇물과 골에 배가 통행하는 이익이 있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금강 하류지역의 여러 지천으로도 조수가 거슬러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강을 끼고 있는 시장을 강상이라 불렀는데 강경은 대동강을 낀 평양과 낙동강을 낀 대구와 더불어 전국 3대 강상이었다. 내륙 깊숙이 있으면서도 100여톤급 중선배가 드나들던 강경포구는 금강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물이 넘쳐나던 물류의 중심이었다.

일제 초기부터 반세기 동안 성어기에는 하루에 1백여 척의 어선들이 포구에 들어와 생선을 산더미같이 부렸고, 전국에서 상인들이 하루에 2, 3만 명씩 몰려들었다.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연기군 금남면 용포에서 강경장까지 배를 타고 시장을 보러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 입포 배수펌프장. 금강 하류로 흘러드는 지류마다 이런 배수펌프장이 설치되어 있다. ▲ 부여군 장암면 상황천 중류에 있는 배수갑문. 조수가 역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철로개통과 토사 퇴적으로 하항기능 상실
내륙수운을 기반으로 한 이 같은 번영은 철로가 개통되면서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1년 호남선 철도의 대전∼강경 구간이 개통되었고, 1912년에는 군산선(익산∼군산)이 개통되었다. 하항으로서 갖는 강경포의 상업기능은 차츰 호남선에 넘어가게 되었다. 강경포는 1931년 장항선이 개통됨에 따라 강경포는 충남 서남부의 상권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강바닥에 토사가 유입되어 수심이 차츰 낮아지면서 금강 중하류 지역의 포구들은 그 기능 서서히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해방 후 에너지 부족으로 금강유역에서도 마구잡이 벌채로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하자 대량의 토사가 금강의 강바닥에 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금강의 수운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강경과 부강이 하항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반면 군산항과 장항항의 기능은 강화되어 대조를 이루었다. 일제는 호남지방의 쌀 수탈을 위해 1908년에 전주-군산 간에 최초로 신작로를 개설하여 군산항은 쌀의 집산지가 되었으며 장항선이 개통되면서 충남 지역을 쌀은 장항으로 모여 배에 실렸다. 또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경공업 중심의 소비재가 군산과 장항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 매립이 끝난 군장산업단지. 오폐수처리시설은 완공됐으나 매립한 땅의 분양률은 25%에 그치고 있다.
금강하구둑으로 하천기능 완전 상실
하천에는 치수기능, 이수기능 그리고 환경기능이 있다. 금강하구둑의 개설로 치수기능과 이수기능이 강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방조제 안팎으로 쌓이는 토사로 인해 장기적으로 보면 그 어느 것도 달성할 수 없다. 매년 토사를 준설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바닥의 토사 퇴적으로 집중강우에 지류의 물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며 가옥과 농경지가 침수되자, 지류에 작은 하구둑을 쌓아 배수펌프장을 설치하고 금강 본류의 제방을 높이는 것이 현재의 정책이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더구나 육지와 바다를 잇는 기수역 생태계와 갯벌생태계가 파괴됨으로써 엄청난 환경재앙이 예고되고 있다. 육지에서 몰려드는 영양염류를 바다로 배출하지 못해 내륙은 썩어갈 것이며 육지로부터 유기물을 공급받지 못하는 바다는 어패류가 살 수 없어 사막화가 진행돼가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에 군장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갯벌매립과 새만금간척사업으로 대규모 산업 기지가 건설되고,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여 대중국 무역의 교두보로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될 것으로 많은 현지 주민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땅이 없어 산업단지를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군산산업단지만 해도 현재 분양률이 25%에 머물고 있다. 금강의 환경기능을 복원하여 생태계의 질서를 회복시켜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입포 제방에서 만난 한 주민은 “옛날 이곳에 생선배가 수없이 드나들었다”며 “옛날이 더 살기 좋았다”고 말했다.
<뉴스서천 기회취재단 / 프리랜서 허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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