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는 원래 3칸으로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나
20세기 초에 사랑채를 지으면서 안채를 덧달아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안채는 원래 전퇴(前退)
3칸 집이었으나 덧달아내어 6칸‘ㄱ’자형을 만들었다. 왼쪽에 부엌을 두고 안방, 웃방 그리고 전퇴의 툇마루가 되며 다음은 대청, 맨 끝이
아랫방인데 머릿퇴에 역시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꺾어져서 헛청이 마련되어 부엌이면서 헛간이 되고 아래채로의 통로가 된다. 뒷퇴에는
처마 밑에 덧기둥을 한줄 더 세워서 토방처럼 이용하고 구조를 보강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채는 4칸 전퇴집으로써 머릿퇴를 두었다.
간살이는 서쪽에 대문간을 배치하고 다음은 사랑부엌, 2칸사랑방으로 구성되며 사랑방의 앞퇴와 머릿퇴에는 마루가 놓였다. 사랑부엌 앞퇴도 마루가
깔렸는데 툇마루에서 이용하는 토광으로 쓰인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 보의 단면은 둥근네모꼴로 대강 바심질을 했다.
대문간 지붕틀은
등굽은 중도리(소꼬리보, 충량)를 가로로 걸쳐대고 그 등 위에 외기를 세로로 놓아 중간에 등굽은 중도리를 올리며 여기 등 위에 추녀 끝을
걸쳤는데 전형적인 민가기법이다. 막돌 허튼층쌓기 댓돌이며 덤벙주추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고 우진각 초가지붕집이다.
고방채는 안채의
부엌 앞에 지어진 광채를 말하며, 고방은 부엌이나 안방에 붙어 있는 작은 방으로 잡다한 살림살이나 곡식 등 온갖 물건을 넣어두는 공간이다.
그런데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고방을 따로 집으로 짓기도 하는데 이것을 고방채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방은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방은 광의 원말이다.
서천의 청년정신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징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 없이 생가터에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이다. 생가 앞에는 현재 새로운 전시관이 신축 중에 있으며 이것은
2007년에 완공될 계획이다.
선생의 묘소는 1957년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로 한산의 선영에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천묘하고 부인 강릉유 씨와 합장하였다.
▲ <이상재선생 유물
전시관>
지난 2006년 11월 17일 서천군민회관에서 열린 월남선생의 정신고양을 위한 학술
세미나에서 한 김동길선생의 강연록에 의하면, 통감부 시대에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었다. 그 발회식이 성대하게 거행되는 자리에 이등박문을 위시하여
일본의 고관들과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의 거두들이 참석하였고, 당대의 명사이던 월남선생도 초대가 되었다.
자리에 앉고 보니,
공교롭게도 맞은 편 자리에 이완용과 송병준이 있는 것이 갑자기 비위에 거슬렸던지, 월남은 “대감들도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하니, 이가와 송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 “영감, 별안간 그게 무슨 소리요?”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월남은 태연하게, “대감들이 망하게 꾸미는 데는
천재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이 또 망할게 아니요?”라고 하였다.
해지고 어두운 거리 우리들 청년의 갈 길 험악도 하였어라 모두 다 헤맸네 호걸은
망명하고 지도자 없었네 이 중에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 나라의 청년들 의지하던 곳 오직 당신만이 높고 높은
태산의 준령이셨네 오오 당신은 이 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이셨네
시인 월탄 박종화는 다음과 같은 추모시로써 월남선생의 행적을 기리면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선생의 삶을 교훈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 나라의 청년들 의지하던 곳,
오직 당신만이 높고 높은 태산의 준령이셨네”란 그의 시가 우리들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제2, 제3의 이상재가 그 정신으로 살아나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