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의 문화재 탐방<10>
우리고장의 문화재 탐방<10>
  • 이강선 기자
  • 승인 2006.12.29 00:00
  • 호수 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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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가옥·생가(지)

- 서천이하복가옥·이상재선생생가지 -



중부지방 전형적인 전통가옥

▲ <서천이하복가옥 전경> 서천이하복가옥(舒川李夏馥家屋)은 중요민속자료 제197호로 기산면 신산리 120번지 청암문화재단의 소유이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농가이며, 안채는 중요민속자료 제197-1호, 사랑채는 중요민속자료 제197-2호, 고방채는 중요민속자료 제197-3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후에 따른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특징 중 중부형과 남부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부형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ㄱ'자형을 기본으로 하여 ’ㄷ'자, ‘ㅁ’자, ‘一’자형이 혼합되어 있다. 관북의 폐쇄적 구조와 남부의 개방적 구조의 결합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것은 난방을 고려하면서 통풍의 기능을 어느 정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고 부엌은 안방에 이어져 있거나 한쪽 귀퉁이에 있다. 우리나라 가옥의 가장 기본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멸악산맥 이남에서 차령산맥의 북쪽에 주로 분포하며 한강유역이 그 중심이 된다. 큰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현저한 특징이다.남부형은 전형적인 홑집의 ‘一’자형으로 중부형에 비해 개방적이다. 개방적 구조로 대청마루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앞뒤로 벽체가 없는 대청마루는 가장 개방적인 구조로 영남과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충남북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속한다. 부엌, 방, 마루와 툇마루가 기본구조를 이루며 문지방의 높이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서민주택 중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一’자형 몸체 이외에 광, 헛간, 외양간, 측간 등으로 구성된 부속채가 별도로 세워진다. 서천이하복가옥은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를 형성하며 몸채의 공간과 아래채의 공간으로 나누어지는데 두 개의 나란한 축으로 되어 있다. 목은 이색의 18대손이며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낸 이병식이 조선말에 안채 3칸을 건립하면서 이 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아들 이형규가 사랑채와 아래채, 위채를 증축하면서 전체적인 모습이 형성되었다. ▲ <서천이하복가옥 대문>
안채는 원래 3칸으로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나 20세기 초에 사랑채를 지으면서 안채를 덧달아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안채는 원래 전퇴(前退) 3칸 집이었으나 덧달아내어 6칸‘ㄱ’자형을 만들었다. 왼쪽에 부엌을 두고 안방, 웃방 그리고 전퇴의 툇마루가 되며 다음은 대청, 맨 끝이 아랫방인데 머릿퇴에 역시 툇마루가 시설되었다.

꺾어져서 헛청이 마련되어 부엌이면서 헛간이 되고 아래채로의 통로가 된다. 뒷퇴에는 처마 밑에 덧기둥을 한줄 더 세워서 토방처럼 이용하고 구조를 보강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채는 4칸 전퇴집으로써 머릿퇴를 두었다. 간살이는 서쪽에 대문간을 배치하고 다음은 사랑부엌, 2칸사랑방으로 구성되며 사랑방의 앞퇴와 머릿퇴에는 마루가 놓였다. 사랑부엌 앞퇴도 마루가 깔렸는데 툇마루에서 이용하는 토광으로 쓰인다. 구조는 1고주5량이며 보의 단면은 둥근네모꼴로 대강 바심질을 했다.

대문간 지붕틀은 등굽은 중도리(소꼬리보, 충량)를 가로로 걸쳐대고 그 등 위에 외기를 세로로 놓아 중간에 등굽은 중도리를 올리며 여기 등 위에 추녀 끝을 걸쳤는데 전형적인 민가기법이다. 막돌 허튼층쌓기 댓돌이며 덤벙주추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고 우진각 초가지붕집이다.

고방채는 안채의 부엌 앞에 지어진 광채를 말하며, 고방은 부엌이나 안방에 붙어 있는 작은 방으로 잡다한 살림살이나 곡식 등 온갖 물건을 넣어두는 공간이다. 그런데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고방을 따로 집으로 짓기도 하는데 이것을 고방채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방은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방은 광의 원말이다.

서천의 청년정신   

▲ <이상재선생 초상> 이상재선생생가지(李商在先生生家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84호로 한산면 종지리 263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조선 후기 민족의 스승인 이상재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선생은 1850년 10월 26일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이희택과 밀양 박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로서 1927년 3월 29일 타계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루어진 인물이며, 그는 종교가·정치가로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다. ▲ <복원된 이상재선생생가>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징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 없이 생가터에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이다. 생가 앞에는 현재 새로운 전시관이 신축 중에 있으며 이것은 2007년에 완공될 계획이다.

선생의 묘소는 1957년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로 한산의 선영에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천묘하고 부인 강릉유 씨와 합장하였다.

   
▲ <이상재선생 유물 전시관>

지난 2006년 11월 17일 서천군민회관에서 열린 월남선생의 정신고양을 위한 학술 세미나에서 한 김동길선생의 강연록에 의하면, 통감부 시대에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었다. 그 발회식이 성대하게 거행되는 자리에 이등박문을 위시하여 일본의 고관들과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의 거두들이 참석하였고, 당대의 명사이던 월남선생도 초대가 되었다.

자리에 앉고 보니, 공교롭게도 맞은 편 자리에 이완용과 송병준이 있는 것이 갑자기 비위에 거슬렸던지, 월남은 “대감들도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하니, 이가와 송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 “영감, 별안간 그게 무슨 소리요?”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월남은 태연하게, “대감들이 망하게 꾸미는 데는 천재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이 또 망할게 아니요?”라고 하였다.

해지고 어두운 거리
우리들 청년의 갈 길
험악도 하였어라
모두 다 헤맸네
호걸은 망명하고 지도자 없었네
이 중에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
나라의 청년들 의지하던 곳
오직 당신만이
높고 높은 태산의 준령이셨네
오오 당신은
이 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이셨네

시인 월탄 박종화는 다음과 같은 추모시로써 월남선생의 행적을 기리면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선생의 삶을 교훈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들의 등불, 나라의 청년들 의지하던 곳, 오직 당신만이 높고 높은 태산의 준령이셨네”란 그의 시가 우리들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제2, 제3의 이상재가 그 정신으로 살아나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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