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험버트(3회)
나의 험버트(3회)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7.01.26 00:00
  • 호수 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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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남희, 그림 / 정미라

   
“……원아. 원아?”

장난기 섞인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팔을 위로 휘저으며, 우음, 하고 잠투정을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자, 허공에서 휘둘러지는 내 팔을 피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아빠…….”

툴툴대듯 그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나는 휘젓던 팔을 아래로 내려 눈을 비비며 투덜댔다.

“원이라고 부르지 말래도 그러네.”
“싫다, 야.”

그는 애교 부리듯 싱긋 웃어 보였다. 연상의 엄마에게 어리광도 가끔 부리는 아빠는, 교생선생이었던 엄마를 덥석 낚아챘던 열여덟 살 소년 같았다.

아빠는 어깨 길이에서 잘라 살짝 층을 낸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쓰다듬었다.

“오늘 새 학기 첫날인데 어땠어?”
“그럭저럭 괜찮았어…….”

나는 하품을 길게 하며 대답했다. 눈물이 괸 눈을 다시 비비며 웅얼대듯 물었다.

“그런데 왜 깨운 거야?”
“응? 아, 밥 먹으러 오라구.”

아빠는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그러다 웃는 얼굴 그대로 물어왔다.

“선생님은? 반 친구들은 어땠어?”
“반 애들이야 저번 애들하고 그렇게 다를 바 없지 뭐.”
“으이그, 이 녀석 좀 보게! 모름지기 다른 사람에게 신경도 좀 쓸 줄 알아야 돼. 그렇게 정이 없어서야…….”

쯧, 혀를 차고는 다시 묻는다.

“너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 모르지?”
고개를 끄덕이자 훈계하기 시작한다.
“봐, 니가 얼마나 다른 사람한테 신경을 안 쓰나. 너, 중3 때 애들이랑 고1 때 애들이랑 뭐가 다른지 구분 안 가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다시 혀를 찬다.

“아무튼…… 다른 사람한테도 좀 신경 쓸 줄 알라구.”
“아무데나 집적대면 그건 정이 아냐, 오지랖이지.”
“아이고, 말하는 투 좀 보게!”

탄식하듯 말을 뱉는 아빠를 보면서 나는 미적미적 침대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러 가야한다며. 엄마가 화낼라. 엄만 밥상 차려놓고 안 오는 사람 무지 싫어하잖아.”
“아참, 그렇지.”

아빠는 나를 앞질러 후닥닥 밖으로 나갔다. 투닥닥닥 하는 급한 발소리가 이어지고, 조금 화난 듯한 엄마에게 아부성 발언을 하는 소리까지. 나는 피식 웃었다.

아빠는 열여덟 살 때 교생선생으로 왔던 스물세 살의 엄마를 만났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에게 첫눈에 반하고는 대시를 시작했다. 남학교였던 터라 연적들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이 이야기를 할 때의 아빠는 흡사 마왕에게서 공주를 구출해 온 용사 같았다―엄마와의 연애에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평탄하고 멋지기만 하다.

문제는 혈기에 들끓은 아빠였다. 아빠는 엄마를 유혹하고 어르고 달래서 끝내는 엄마의 교생실습 마지막 날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물론 송별회랍시고 엄마를 포장마차로 끌고 가서 취하도록 술을 먹였다고 한다. 내가 봐도 못 말리는 남자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그 한 번 때문에 내가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는 거다…….

혼전임신. 은어로는 속도위반, 이라고 한다. 어쨌든 나는 엄마 아빠가 그 사고를 친 다음 해 3월에 태어났고, 엄마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사직을 하며 나를 계속 키우다 아빠가 졸업 하자 마자 결혼했다. 그 뒤로 전업 주부로 변신. 아빠는 대기업의 말단직원으로 입사.

이상이 엄마 아빠가 내게 들려준 둘의 연애 담이다. 웃기게도 초등학교 3학년짜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물어보았었다.

엄마, 쇼타콤이었어?

……어렸을 때의 나는 상당히 조숙했다.

터벅터벅 밖으로 나가 식탁 앞에 앉았다. 아빠는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고, 엄마는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졸려 보이는 내 얼굴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아빠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너, 담임선생님 얘기는 하나도 안 했잖아.”
“남선생이래.”

엄마가 대신 대꾸했다. 아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느 과목?”
“음악.”

나는 김치를 깨작이며 대답했다. 고명을 털어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집어 들었다. 아빠는 반색했다.

“어, 그럼 너한테는 좋겠네! 미래의 위대한 뮤지션 반희원 양의 담임으로 음악선생이 정해지다니…….”
“뭐, 도움 되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렇게 대꾸하고 나서 생각하니, 그의 긴 손가락이 생각났다. 피아노를 오래 쳐서 그렇게 손가락이 길어진 것일까. 그의 긴 손가락을 보면서도 음악선생이라 길어졌구나 하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었는데.

“아빠도 학교 다닐 때 밴드였잖아. 키보드는 아니었지만 기타 쳤었다구.”

아빠는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마디가 굵은 손을 내보이며 자랑스레 웃었다. 그의 손과는 너무나 다른, 굵은 손이다. 그의 손은 길면서 가늘고 희었는데. 너무나 다른 손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젓가락을 쥐고 있는 내 오른손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나는 어떤 손을 가지게 될까. 그 같은 피아니스트의 손을 가지게 될까, 아니면 아버지 같은 크고 굵은 손마디의 기타리스트가 될까.

아빠는 아련한 듯 웅얼거렸다.

“와, 아직도 그 때 생각난다. 내가 메인으로 나가서 보컬 뒤에서 기타 치면 여자애들이 완전 자지러졌었는데.”

그 말에 엄마의 눈빛이 곱지 않게 변해갔다. 그 기색을 눈치 채고, 나는 식탁 아래 있는 아버지의 정강이를 살짝 걷어차고 눈을 흘겼다.

“알았어, 알았으니까요. 사랑하는 아버님, 미역국이 식사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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