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명의 해민탄압으로 쫓겨온 환국교민”
“왜구는 명의 해민탄압으로 쫓겨온 환국교민”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7.12.07 00:00
  • 호수 3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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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사학자 김성호 “최영-요동정벌·이성계-사전개혁은 왜구 해결책”

■ 여말선초 왜구의 정체


    고려조 충정왕 2년(1350년 경인년)부터 조선초 1399년의 50년간 왜구는 우리나라의 전 해안에 출몰하였다. 해안 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히 쳐들어와 약탈을 하기도 했다. 100척 이상의 대선단을 이룬 것만도 11회에 걸쳐 모두 1,613척이었으며 기마병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작은 섬나라의 해적 집단들이 50여년간 지속적으로 우리 해안을 대규모 선단을 이루어 침략할 수가 있었던 것인가.
농업관료 출신의 재야 사학자 김성호는 그의 저서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996 맑은소리사)에서 이들의 정체를 중국에 진출해 있던 백제 교민들의 환국사태로 보았다. 그의 주장을 정리했다.<편집자>


한반도의 서남해역으로 진출한 백제는 주요 포구에 담로를 건설하였으며 이미 1세기경에 일본 규수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과, 탐라, 그리고 중국의 주산군도를 연결하는 고대 해상교역권을 형성하였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왕망의 신나라(8~23) 때 주조되었고 후한 초기(AD40)까지 사용되었던 왕망전이 제주와 김해 패총을 비롯해 북규수의 나가사키, 후쿠오카, 교토 등지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백제가 660년에 멸망하자 중국의 주산군도 및 절강성 등지에 가있던 백제인들은 모국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치 하와이에 이민간 우리 교민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것과도 같았다. 이러한 중국 진출 교민들의 지원과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의 장보고는 거대한 해상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농본국가였다. 모든 부의 창출을 농업에서 찾았으며 백제 후손들이 수행하던 국가간의 교역을 탄압하였다. 특히 강력한 통일국가가 등장할 때 탄압은 더욱 심하였다. 왕조 초기의 기상이 쇠퇴해지며 말기에는 변방에서 일어난 세력이 위세를 떨치곤 했는데 주산군도를 중심으로 한 백제 후손들은 이 때마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원나라 말기에 들어서자 중국진출 백제 교민사회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1368년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이갑제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농촌 위주의 정책을 폄과 함께 주산군도를 근거지로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세력을 적극 탄압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본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주원장의 적수는 망해가던 원나라가 아니었다. 총력을 기울여 해상세력을 발본색원하려 들었다. 이에 백제 교민들은 보트피플이 되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하였다.

명초 주산군도 해민은 11만호였는데 이로 미루어 절강성, 광동성, 복건성 등지에 존재했던 교민들까지 합치면 총 교포의 수는 40여만호 2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중국 동해안 각 곳에서 해난을 일으켰으며 10여만명이 고려로 넘어왔다. 명의 태조 주원장은 이들을 '왜구'라고 이름 붙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처음에 이들을 받아들여 농토를 주고 관작을 주는 등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끝없이 밀려드는 이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약탈자로 변한 이들을 적극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다 명나라의 요구는 거의 약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왕 5년(1379) 명은 고려사신을 유폐하고 황금300냥, 은 1천냥, 말 450필, 무명 4,500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또 우왕 8년에는 황금1백근, 은 1만냥, 무명 1만필, 말 1천필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며, 우왕 9년에는 지난 5년간 바치지 못한 말 5천필, 황금 5백근, 은 5만냥, 무명 5만필을 바쳐야 성의로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은 묘수를 내놓았다. 환국교민들을 군대조직으로 흡수하고 중국에 잔존해 있는 교민세력과 합세하여 명나라를 치는 것이다. 이는 골치 아픈 환국교민 문제와 명의 압박을 물리치는 묘안이었다. 이에 환국 교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면서 왜구들의 준동이 거의 사라졌다. 1388년(창왕 원년) 마침내 5만의 요동정벌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반란으로 이 웅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왜구의 약탈이 시작됐다. 그러면 이성계는 어떻게 이 왜구 문제를 수습했는가. 그것은 고려 권문세족들의 땅을 빼앗아 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정착을 시킴으로써 해결하였다. 이것이 사전개혁이었다.

조선 건국 후 조선 조정은 대마도와 일본으로 들어간 왜구라 불리는 이 백제 후손들에게 '대마도 정벌' 등 강경책도 썼지만 대체적으로 교린책으로 다스렸고 삼포를 개항하여 이들이 무역에 종사하도록 허가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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