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 아니면 모두 꼴찌인가
일등 아니면 모두 꼴찌인가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4.07 00:00
  • 호수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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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육 정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③

   

▲ 권기복 칼럼위원

“주형이 어머니, 축하드려요. 주형이가 H고등학교 입학시험에 7등을 했더군요.”
“그래요? 재일이는요?”
“아, 예. 재일이는 1등을 했고요.”
“재일이는 1등을 했는데, 우리 애는 7등이라면서 무슨 축하래요?”
“그만하면 주형이도 아주 잘 한거지요.”
“에이, 우리 애는 재일이를 한 번도 못 이기잖아요. 7등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1등을 해야죠.”

작년에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하면서 학부모와 나눈 전화 통화의 일부이다. 우리 반에서 H고등학교에 1등과 7등 성적을 거둠으로써 담임에게도 많은 축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7등을 한 주형(이름은 모두 가명임)이는 우리 학교에서도 10위 권 밖의 성적이었기에 다른 선생님들도 ‘참, 잘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학부모의 욕심은 단숨에 1등까지 치닫고 있었다.

위 학부모의 1등 욕심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성적은 상대방을 꺾고 올려 세워야 하는 바벨탑이다.

당시에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은 하늘 높이 올라서 신의 세계까지 침범하려 하였다. 이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바벨탑은 무너지고, 인간들의 의사소통은 제각각 다른 언어로 변화되어 두절되게 되었다. 서로 간 언어의 다름은 생각의 다름까지 가져왔다고 성서에 전하고 있다.
이제는 상대편에 대한 배려 없이 나만이, 아니 나의 자식만이 바벨탑을 세우게 하고 있다.
강남에서는 24개월 된 아이에게 수학 3~4 영역, 영어 2~3 영역씩 사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한다. 초·중학생은 7~10 영역으로 늘리고 있다. 영역별로 1시간씩 교육을 시킨다고 하면, 학생들은 학교보다 사교육을 받는 시간이 많고, 취학 전의 아이들은 걸음마 단계부터 사교육 시장에 내몰리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의식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영재 교육은 어떠한가? 모든 부모에게 자기 자신의 자녀는 모두 영재이다. 이러한 부모의 믿음을 이용하여 ‘영재 만들기’ 사교육 시장 또한 그 열기가 가마솥을 달굴 정도이다.

영재 성향을 가진 특별한 학생들을 발굴하여 영재 교육을 하겠다는 취지는 여지없이 무색해졌다. 평범한 학생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선수학습으로 영재 교육을 받고, 영재학교에 입학하여 특별한 교육과정을 통해 명문대학에 진출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부터 양반 계층의 확산과 몰락,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원주민, 해방 이후 한국 전쟁과 미국 물결의 대거 유입, 급속한 농경사회의 붕괴와 산업사회로의 전환 등으로 인하여 상·하 신분적 요소가 소멸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내 자식만큼은 으뜸으로 만들겠다는 부모들의 사고가 팽배해졌다. ‘일등 자식’이라면, 부모의 인생을 걸고 투자하고자 하는 심리가 만연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정당치 못한 돈벌이를 하면서까지 자식의 사교육비를 마련하고자 하고 있다. 가계지출비 중에서 사교육비 부담은 나날이 무거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21세기를 흔히 무한경쟁 시대라고 한다. 국경이나 제도, 국민 의식 등에 보호를 받던 시대는 물 건너갔다. 남보다 빠른 사고, 남보다 좋은 제품, 남보다 편리한 제도 등을 수행하여야 앞서 갈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열풍은 최빈국에서 선진국 대열에 동참할 수 있게 한 순기능적 역할을 하였다. ‘부지런하고, 두뇌 회전이 빠르고, 손발이 정확한 한국인!’으로 세계에 정평이 난지 오래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대충대충, 빨리빨리’로도 정평이 나 있다.

우리 국민들이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한 측면도 있지만, 이로 인한 병폐도 그에 못지않다. 1세기만 거슬러 올라가도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던 우리나라가 오늘날에는 ‘동방불손지국’이 되어 버렸다. 산업화와 함께 깊이 찌들은 물질만능주의는 더 이상 청소년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존중심을 갖지 않게 만들고 있다.

‘내 자식만 이롭고, 잘 하면 된다’는 식의 부모관은 웃어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부모로서의 자격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지혜는 기대할 곳이 없게 되었다. 그 결과는 오히려 내 자식을 외톨이로 만들고, 로마 시대의 검투사로 내 모는 꼴이 되고 있다.

경쟁이 심해지고, 사회가 급변할수록 사람은 소외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 혼자’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이 필요하다. 1등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남들이 외면하는 외로운 자리이다. 나만 1등 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단편적인 생각을 버려야 할 때이다.

꼴찌도 성적이 아닌 다른 면에서는 얼마든지 1등을 할 수 있다. 성적 1등을 위해 엄마 품에서 한창 옹알거릴 24개월짜리 아이가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리는 반인륜적인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의 지나친 교육 열풍은 반인륜적, 반사회적인 병폐를 안고 있다. 지나친 성적 경쟁은 진실한 학문 탐구와 사회 발전에 저해될 뿐이다.

‘1등 아니면 모두 꼴찌’라는 생각부터 버리자. ‘꼴찌도 다른 면에서는 1등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자. 우리 사회는 ‘나만 1등 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헛된 의식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미래 사회는 1%가 77%를 먹여 살린다는 말도 있다.

만일 그와 같이 된다면, 1%는 그들대로 ‘왜 우리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77%를 먹여 살려야 하느냐?’ 할 것이고, 77%는 ‘우리가 거지냐? 우리에게도 일을 달라’ 하고 불만을 터뜨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불만과 불신이 팽배해지고, 군중 속의 고독은 골이 깊어갈 뿐이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 벌레들끼리 서로 오르고자 한 것은 한 낱 벌레기둥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 사회의 부모들은 ‘일등 자식’을 만들려고 하는 대신, ‘자기 인생을 알차게 가꾸는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진정한 어버이가 되기를 바란다.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1등을 한 벌레가 아니라, 자신의 혁신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나비라는 점을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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