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에 대한 단상
모래시계에 대한 단상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5.19 00:00
  • 호수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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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복
칼럼위원

20일 전에 텔레비전에서 배우 최민수의 ‘70대 노인 폭행 사건’에 대한 기자 회견 장면을 잠시 보았다. 그 사건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며 반성한다는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독기가 배어 있었다. 그는 피해를 당한 노인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를 빈다고 참회하였다. 한 기자가 “당신 아들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최민수는 당황해 하면서,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라고 답변했다. 그 직후에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필자에게도 최민수는 인상이 깊은 배우다. 10년 전인가, 한창 <모래시계> 드라마 열풍에 휩싸였을 때, 사형장에서 교수형 직전, “나, 떨고 있니?” 하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모래시계>가 한창 방영될 때에는 전국의 도시 시내가 썰렁할 정도였다. 특히 남자에게 관심이 높은 드라마는 그 드라마로 끝이 아니었던가 싶다. <모래시계>의 열풍 한 중심에 최민수가 있었다. 한국의 앤소니 퀸이라고나 할까? <모래시계>는 그를 연기파 배우로서 자리매김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노인 폭행 사건’에 당혹해 했으리라. 대한민국의 배우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그가 70대 노인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사실을 믿겨지지 안했을 것이다. 눈빛 하나로도 전국의 시청자를 압도할 수 있는 그가 그저 평범한 노인 폭행이라니.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 치더라도 그 얼마나 치졸한 장면인가! 하물며 영화도 아닌 현실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배우라는 생각을 갖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항상 부족한 배우로서 더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렇게 오만한 사고와 행동이 분출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녀노소가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노라고 생각했더라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국민 배우가 아니라, 세계인의 배우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최민수의 모습은 또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곳곳에서 보인다. 의사가 환자에게 반말을 하고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나 법관이 법정에서 범죄 유무에 관계없이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검찰과 경찰도 시민을 위한 공복이라는데 수긍이 안 되는 실정이며, 일반 공무원도 비슷한 처지다. 심지어 집단 폭력이나 성폭행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어 진다.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 가닥 하는 사람’이라거나 ‘내가 한 가닥 하는 사람과 연줄이 있다.’는 우월의식에 빠져 있다. 우월의식은 필연적으로 자만심을 가져다준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자만심은 상대편의 인격에 상처를 주게 된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당연히 상처를 준 사람을 멀리 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사상누각(沙上樓閣)으로 변질되고 있다. 

사상누각이 사라지는 것은 모래시계의 시간 만큼일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우리 사회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러기 전에 서로서로 인간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진정한 사람 사는 마을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상처를 살피고 보호해주는 그런 사회를 만들자고 외치고 싶다. 우리 모두 더 이상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버이가 되자고 외치고 싶다. 필자는 그 해결책을 마지막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당신이 나의 하늘이오.”

 *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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